지난번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바로가기)에 이어 오늘은 프랑수아 마트롱(François Matheron)의 글 일부를 번역해 올립니다.^^ 원문은 François Matheron, “Des problèmes qu’il faudra bien appeler d’un autre nom et peut-être politique ― Althusser et l’insituabilité de la politique”, Multitudes No.22, 2005/3(바로가기)입니다.
프랑수아 마트롱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알튀세르 주요 유고의 편집자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적 이례성』(야만적 별종)과 『제헌 권력』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제헌 권력』은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공역입니다), 현재는 철학 잡지 Multitudes 편집실 공동사무처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인터뷰와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장진범 선생님께서 번역해 주셨습니다. 까다로운 원문을 꼼꼼하게 번역해 주신 장진범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글은 정치와 철학,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라는 알튀세르 필생의 화두를 다루고 있는데, 이 화두는 특히 1966년 이래 다양한 ‘자기비판’을 통해 한층 명시되고 전면화된 바 있다. 알튀세르 유고의 편집자이기도 한 프랑수아 마트롱은, 이 질문을 사고하기 위해 알튀세르가 경유한 특권적 대상이 다름 아닌 마키아벨리였음을 세심한 유고 분석으로써 논증한다. 일찍이 1972년에 ‘책’의 형태로까지 정리되었지만 끝내 미완성·미발표 원고로 남은 『마키아벨리와 우리』는, 알튀세르에게 일종의 ‘지적 실험실’ 노릇을 했고, 결국 알튀세르 자신, 나아가 맑스주의 전통을 능동적인 의미에서 ‘미완성’ 곧 ‘해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마키아벨리 독서를 통해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론주의’를 정정할 수단을 다듬었으며, 맑스주의 전통에 내재한 반(反)정치주의 경향을 발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와 알튀세르(따라서 결국 맑스)의 대화, 그 결정적 효과 중 하나로서 정치와 철학에 대한 끊임없는 재개념화는, 1966년 이후 알튀세르의 지적 궤적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일뿐더러, 맑스주의의 미래, 나아가 맑스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와 철학의 미래를 사고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알튀세르 효과’를 사고하려는 모든 이들이 마키아벨리를 우회할 수 없는 까닭이다. ― 옮긴이]

……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위대한 독창성은 기발한 ‘이론적 배치’를 구축해 낸 데 있다. 사실 ‘이론적 공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Machiavel et nous", Écrits philosophique et politique, T.2, Stock/Imec, 1995, p.60). ‘순수 이론’의 공간과 ‘정치적 실천’의 공간 ― 곧 정치적 실천의 우위에 따르는 이론의 공간. 여기서 진정한 문제는 이론적 공간이 둘이라는 점이지, ‘실천의 공간’과 이론적 공간이 대립한다는 점이 아니다. 또는 차라리,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가지 대립이 문제다. 한편으로 두 개의 이론적 공간이 있는데, ‘순수’라는 형용사가 차이를 표시해 주지만, 이는 즉각 추가되는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이라는 문구 때문에 곧장 완전히 상대화된다. “순수 이론의 공간,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론/실천’의 구별 같은 무엇이 재발견된다. “첫번째 공간, 곧 이론적 공간에는 어떤 주체도 없는 데 반해(진리는 있을 법한 모든 주체에게 유효하다), 두번째 공간은 가능하거나 필요한 주체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이론적인 공간”이 의미하는 것은, 어쨌거나 두번째 공간이 사실상 이론적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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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가 볼 때 마키아벨리(그림)는 ‘정치학’의 배치를 해체한다. 보편적 규칙들을 구체적 사례 분석에 적용하기는커녕, 마키아벨리는 정반대로 규칙들의 언표를 성취해야 할 과업의 요구에 따르게 한다. 그는 ‘정세하에서’(sous la conjoncture) 사고한 것인데, 이는 ‘정세에 대해’(sur la conjoncture) 사고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정세의 서로 다른 요소들은 더 이상 이론이 반성해야 하는 객관적 여건이 아니라, “역사적 목표를 위한 투쟁에서 현실적․잠재적 세력이 되고, 그 관계는 세력 관계가 된다”. 즉 이론적 요소들 자체가 정세 안에서 작용하는 세력들이 되는 것으로, 이때의 이론은 실천에 적용될 시 활용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주체 없는 진리들이 되는 것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알튀세르는 1962년에 ‘개념들의 회전문’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을 다른 말로 손질하면서 ‘이론의 낯선 동요’에 관해 말하는데, 이는 자기 안에 ‘어떤 비어 있는(vide) 곳’을 확보하는 역량에 의해 이론을 정치적 차원 안에 들어맞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비어 있는 곳, 다시 채우기 위한 공백(vide), 거기서 위치를 점할/입장을 취할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를 삽입하기 위해 [확보된] 공백, …… 역사가 할당한 정치적 과업을 성취할 수 있는 세력들을 구성하기 위한 공백 ― 미래를 위한 공백(Ibid., p. 62.).”

이 자리가 공백인 까닭은 이탈리아의 정세가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들이 부재하다는 특징을 갖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공백이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나타내고 싶어 하는 모든 이론의 특징이기 때문인가? “나는 이곳이 항상 점유되어 있더라도 비어 있다고 말한다. 내가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 나타나는 이론의 동요를 표시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이 장소는 반드시 다시 채워져야 하기 때문에, 즉 개인이나 당이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한 몫 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동맹 세력들을 다시 결집시키고 주요 세력이 되어 다른 이들을 타도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해질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점유되어 있는’ 비어 있는 자리가 도대체 무엇일까? 알튀세르적 반성의 논리는, 이 자리가, 비어 있는 까닭에, 정말로 점유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마키아벨리적 선언은 『공산당 선언』보다 무한히 더 생산적이라고, 이론은 이 공백을 채울 것을 떠맡는 순간부터 정치적이기를 그친다 ―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과학과 (‘과학’의 성과를 ‘대중들’이 수용하게 만들려 하는) 정치 선전의 이분법에 직면하게 된다 ― 고 단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사고와 삶이 알튀세르를 이끄는데, 이를 지배하는 정반대의 원리에 따르면 정치적 주체들은, 오늘날에야말로, 노동자계급 및 그 당이라는 모습과 동일화될 수 있으며, 이 자리는 최종적으로는 결코 비어 있지 않다. 항상 비어 있는 자리와 항상 가득 찬 자리 사이, 우리는 정치에 관한 알튀세르적 구상을 특징짓는 긴장의 한가운데 있다.

철학, 정치: 카드를 섞기

마키아벨리에 관한 반성은 1966년 이래 정치와 철학이라는 관념들을 둘러싸고 알튀세르가 수행한 극히 복잡한 곡예의 원천 중 하나이며, 생전에 공간된 작업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철학의 외적 조건 중 하나인 동시에 내적 요소들 중 하나, 어쩌면 철학의 고유한 요소로서 정치. 1966년 이래 진척된 다양한 ‘자기비판들’에 본질적인 특징이 이것이다.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의 알튀세르가 볼 때, 맑스는 새로운 과학(‘역사유물론’)과 동시에 새로운 철학을 창시했다. 후자는 맑스에게서 주로 ‘실천적 상태’에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말하자면 이론적 상태로 철학을 정교화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철학은 과학적 성질을 지녔고 또 지닐 것으로, 즉 ‘순수 이론’의 공간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철학의 재정치화’가 장차 문제 삼게 될 것이 바로 이것으로, 이 몸짓[철학의 재정치화]으로써 알튀세르는 철학을 과학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는 동시에, 정치의 본성 자체에 관한 명시적 불안으로 나아가게 된다. 알튀세르가 구축하려던 새로운 배치의 복합성이라는 관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시기가 거의 같은 두 문구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프란카에게 보내는 1966년 9월 13일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반성이 나타난다. “역사유물론은 일반 이론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 이론이나 정치적인 것과 정치의 이론 …… 또는 이데올로기 이론이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경제적 심급의 이론은 …… 이 일반 이론의 국지적 이론들이라는 게 요즘 내 생각입니다.” 따라서 정치는 심급들의 체계 안에서 규정된 자리를 할당받게 된다. 다른 종별적 영역들과 나란히 있는 종별적 영역, 과학 또는 그 자체로 종별적인 과학들의 대상. 편지에서는 누가 이 자리를 할당하는지 말하지 않지만, 답이 무엇인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철학 이외의 무엇일 리가 없는 것이다. 알튀세르 서고에 보관된 긴 육필 노트가 이를 확증한다.

복수의 일반 이론들이 있으며 …… 이들은 국지 이론들을 결집시킨다. 국지 이론들과 일반 이론들을 서로 비교하면 …… 일반 이론들 사이의 공백들, 즉 새로운 일반 이론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 이 진술은 ‘최상의 일반 이론’(또는 철학)에 대한 진술이자 요구일 뿐이다.” 철학은 이처럼 다른 이론들의 집합에 자리들을 할당하는 ‘최상의 일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분석에서 해체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철학이 사고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존하는 국지 이론들과 일반 이론들의 집합의 정세다. 철학이 현존 이론들의 정세에 대한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철학이 이론들의 이론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 이론들의 일반 이론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게 있다면 절대 지식이 되어 버릴 것이다 ― 철학은 현재적 연접(連接)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존 이론들의 접합에 대한 이론일 뿐이다. 철학의 대상은 현존 대상들의 현재적 복합성일 뿐이며, 철학 이론은 그 자체가 [이 복합성의] 한 요소다. 정세의 이론이 됨으로써 철학은 그 자체 정세의 효과로, 정정하고-재분류하고-개방하는 효과로 스스로를 생각한다. 따라서 철학은 이론인 동시에 전략으로 실존하며, 전략인 동시에 전술로 실존한다. 정세를 사고한다는 것은 정세에 대한 이 사고의 정정-재분류-개방 효과를 사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모든 철학은 정치적이거나 실천적이다. ‘윤리학’[인 것이다].” ‘현존 이론들의 정세의 이론’인 철학은 실로 ‘최상의 일반’ 이론이다. 하지만 철학이 ‘가장 일반적’이라면, 이는 철학이 항상 ‘현재적’인 정세들 속에서 ‘사물들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한 개입을 목표로 하는 전략인 한에서다. 즉 관용적 의미의 ‘일반적’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의미에서, 곧 ‘정치적’인 한에서다. 역으로, 이 전략의 효과들 중 하나는 철학 자신이 스스로에게, 복합성의 단순한 ‘요소’라는 철학의 고유한 자리를 할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철학은 바로 이 ‘단순한 요소’로서, ‘위치 지어진’(située) 실천으로서 이 일반성을 목표로 삼는다. 대개 철학이 일반성을 목표로 삼는 것은, 철학의 고유한 실천에 대한 전적인 맹목 속에서, 철학의 본질에 대한 전적인 부인 속에서다. 항상 스스로와 다른 곳, 정치의 장소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철학은 사물들에 관한 진리를 단언한다고 우기면서 그 정치적 차원을 끊임없이 부인한다. 맑스주의 철학은, 또는 알튀세르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을 이 철학은, 명시적으로 철학의 고유한 장소에서, 곧 정치의 장소에서 말한다(말할 것이다?). 이 때문에 자연히 가공할 만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왜냐하면 이제껏 살펴본 모든 것이 정확하다면 정치는, 어떤 할당가능한 자리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적어도 용어적 의미에서는, 장소를 차지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 자체를 변용하는 전위들 쪽으로 넘어가 보자.

철학이라는 주제에서 우리가 막 포착한 것을 정치와 관련하여 재발견하더라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정치‘적인 것’이나 ‘정치’는 위치 지어진 장소를 차지하거나, 어떤 경우라도 알튀세르가 1968년 이래 힘주어 강조한 맑스주의적 ‘토픽’ 안에 ‘위치 지어질 수 있다’. 1967년 10월 28일, 「철학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노트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썼다. “토픽이란 자리를 배정하는 것(mise en place)으로, 이론적 장 안에서 장소를 지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장소에 따라서 각 세력에게 부여되는 유효성에 따라 세력 관계를 지정하는 것이다. 모든 자리 배정은, 우선, 세력 관계의 배정이다. 토픽은 이론적이지만, 잠재적으로 실천적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데, 토픽이 그 이론적 표현 안에서, 그 이론적 전개의 양상 안에서(이는 장소를 배정하는 것이다. 도박사들이 노름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잡는 것처럼, 부대가 전투를 위해서 위치를 취하는 것처럼) 이미 고유한 활용법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토픽이 심급들의 자리를 배정할 때 따르는 (모두 같은 것이지만, 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원리는 그 자신에게 여러 심급들 중 하나의 자리를 배정하는 원리다. 하지만 이 원리는 사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처럼 보이는 자리를 정의상 초과한다. 알튀세르가 활용한 카드놀이라는 은유를 취하여 다른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카드 도박사들은 외양상 이미 구성된 배치, 거기서 자리 잡는 게 고작인 이 배치 안에서 스스로 자리를 배정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이 ‘자리를 배정한다’는 심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 심상에 그것이 요구하는 능동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도박사들을 끊임없이 ‘카드를 섞는’ 이들로 사고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철학과 정치는 이처럼 스스로 둘로 나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론’ 지위의 동요야말로 이론을 ‘정치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동요가 확대된다는 점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에는 ‘이론인 동시에 전략인’ 철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자신 둘로 나뉘는 정치적 실천이 있는데, 알튀세르는 「정치적 실천의 독특한 지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1967년 10월 8일 노트 ― 이 노트는 철학에 관한 모음집 예비 서류에서 발췌한 것이다 ― 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 노트에서 정치적 실천은 ‘투명한 동시에 불투명한 지대’로 묘사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실천이란 투명하다. 여기에서 이 작업은 (실재하는 것인지, 장차 구축해야 할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당의 존재론에 깊이 ‘사로잡혀’ 있는데, 당의 존재론은 알튀세르에게 있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는 거기서 진심으로 빠져나오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끝내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다음과 같은 시사적인 관념을 언표했다. “모든 실천은 그 자신의 명증성, 명증성들, 그 자신의 경험을 산출하는데, 이는 자기-정정적이며, 그 결과는 비판과 ‘교훈’ 안에 반영된다.” 여기서 ‘명증성’이라는 관념은 긍정성을 띠는데, 이런 긍정성은 보통 이 관념을 이데올로기에 귀속시킨 알튀세르에게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렇지만 이 투명성은 ‘불투명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된다. “불투명. 우리는 정치적 실천의 이론을 수중에 넣지 못하고 있다.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은 단지 그 가능성의 이론일 뿐이다(게다가 장차 구성해야 하는 이론.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우리는 이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 …… (레닌과 마오 같은) 고전적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은 …… 정치에 대한 정치(une politique de la politique), 즉 정치적 실천에 대한 정치, 정치에 대한 정치의 형태로 된 정치적 실천의 정의이지, 정치적 실천의 이론, 그 작동방식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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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는 이 부재가 결함이라고, ‘참된 이론’을 구축하고,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순수 이론’으로 곧장 나아감으로써,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채워 넣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함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마 동시에 다른 것을 의미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 불투명성이 그 고유한 지정불가능성(insituabilité) 안에서 정치의 본성 자체와 동질적인 것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1967년 5월 4일자 「정치-이론 정세에 관한 노트」에서 알튀세르는 제자들의 발의로 건립된 마오주의 그룹 UJC-ml과 유지했던 관계를 다루면서, 실제로 이렇게 쓴다. “이 경우, 과소평가/과대평가의 근저에서 이론과 정치의 부정확한 관계 설정이 발견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론과 정치 사이의 성급한 단락(短絡)이 발견된다. 즉 정치를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데 이론이면 충분하다는 관념이 발견되는데, 그와는 반대로 올바른 이론에 입각하여 정치를 정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한 정치’가 있어야만 한다. 이 정치에 대한 정치 자체는 이론적으로 사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종별적인 대상, 곧 정치, 즉 정치적 행위의 조건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정치 이론 일반과 구별된다. …… 결정적인 것은 정세의 객관적 내용이다.” ‘정치에 대한 정치’는 여기서 분명 단순한 ‘정치 이론’과 대조되는 가운데 긍정적인 용어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 ‘정치에 대한 정치’ 자체는 이론적으로 사고될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동어반복을 이룬다.……

2010/08/23 22:25 2010/08/23 22:25

어네스토 라클라우: 적대와 헤게모니

『시와 반시』 72호, 2010 여름
김정한


포스트맑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잘 알려진 어네스토 라클라우는 1935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고, 1950-60년대 라틴아메리카에 몰아친 혁명의 바람 속에서 여느 학생들처럼 맑스주의와 사회주의를 가까이 접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1959년 쿠바혁명으로 인해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게릴라’는 혁명의 상징이었고, 더구나 아르헨티나는 체 게바라의 조국이었다. 라클라우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중앙위원회의 학생대표였고 철학학생연합센터의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1960년대에는 전국좌파사회당(PSIN) 지도부의 일원으로 여러 좌파운동에 참여했다. 1967년 체 게바라가 총살되고 유럽에서 1968년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주선으로 옥스퍼드에서 연구활동을 시작하여 1973년부터 에섹스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2002년 이후에는 뉴욕주립대 비교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지만, 에섹스대학은 그의 명성을 반영하듯 지금까지도 영미권에서 담론(discourse) 분석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루이 알튀세르는 맑스주의를 혁신하는 철학자로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데, 라클라우도 알튀세르가 널리 읽히는 지적 환경에서 맑스주의에 입문한다. 물론 나중에는 알튀세르의 일부 철학적 개념들에 새겨진 구조주의적 요소와 거리를 두면서 안토니오 그람시를 더 전면에 내세우지만, 알튀세르의 영향력은 라클라우의 저작들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라클라우에게 알튀세르와 그람시가 맑스주의적 문제틀을 연마하는 데 도움을 준 이론적 자원이라면, 그에 관한 성찰의 원천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손꼽는다. 구조주의가 상징계(the symbolic)라는 ‘언어의 세계’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회와 역사를 분석했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상징계의 외부로서 ‘언어의 바깥 세계’를 사유의 주춧돌로 삼아 구조주의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시도이다. 가령 데리다의 결정불가능성(undecidability) 개념은 한 사회가 구조적 인과관계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정치적 실천들의 절합(articulation)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라캉의 누빔점(point de capition) 개념은 어떤 특수한 요소일지라도 다양한 정치적 실천들을 하나로 누벼서 묶어주는 결절점(nodal point)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사고하도록 한다.1) 다시 말해서, ‘언어의 세계’는 어떤 구조를 갖고 있지만 이 구조는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contingency), 보편성이 아닌 특수성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언어로 포괄될 수 없는 ‘언어의 바깥 세계’가 근본적으로 ‘언어의 세계’를 구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라클라우는 언어의 구조와 그 외부를 동시에 사유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철학적 개념들을 가공하여 맑스주의 정치(학)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며, 이런 맥락에서 포스트맑스주의(post-marxism)에서 포스트(post)는 그 이중적 의미에서 후(後, after)나 탈(脫, beyond)이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와 맑스주의의 결합을 표현한다고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1. 적대

하지만 라클라우는 자신의 기획을 포스트맑스주의보다 급진민주주의(radical democracy)라고 부르길 선호한다. 급진민주주의 전략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좌파의 과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급진적이고 다원적으로 심화하고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민주화’로 표현할 수 있는 이런 결론은 첫눈에 보기에 혁명적 좌파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전략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라클라우가 그의 지적 동반자인 상탈 무페와 함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을 집필하던 시대에는, 1980년대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폭풍 속에서 노동자운동이 침몰하고 1968년 혁명 이후 여성운동과 생태운동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신사회운동들이 부상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에서 급진민주주의 전략은 약해지는 노동자운동과 강해지는 신사회운동들을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폐지를 포함하여 다양한 불평등을 제거하려는 야심찬 시도였다.

급진민주주의 전략의 핵심 표어는 반본질주의(anti-essentialism)이다. 라클라우는 구좌파들이 정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채 이론적, 실천적으로 무능력한 이유가 본질주의 ― 여러 요소들 가운데 어떤 한 요소를 나머지 모든 요소들의 본질로 상정하는 ― 에 있다고 비판한다. 본질주의에 빠진 구좌파들은 1) 노동계급이 사회 변동의 근본적 추진력을 담지하는 특권적 행위자라는 계급주의, 2) 국가의 역할 확대가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이라는 국가주의, 3) 성공적인 경제 전략이 필요한 정치적 효과를 보장한다는 경제주의, 4) 사회를 합리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해 중앙집중적 권력이 필요하다는 자코뱅적 혁명관을 고수할 뿐이다.2) 그러나 다양한 사회운동들 중에서 노동자운동이 선험적인 우위에 있지는 않으며, 다양한 정치적 주체들 중에서 노동계급이 선험적인 특권을 가질 수는 없다. 이는 경제가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필연적으로 결정하는 본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는 서로 동등하게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과정에 참여하며, 최종심급에서 경제가 모든 것을 단순결정하는 고독한 순간은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3) 또한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중앙집권적으로 위로부터 사회를 변혁하는 ‘기동전’에 집착할 이유는 없으며, 오히려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지속적인 민주화 과정, ‘진지전’이 필요하다.

적대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유래하는 계급 적대가 다양한 사회적 적대들 중에서 선험적인 보편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맑스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와는 달리, 라클라우는 계급 적대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자본주의에는 계급 적대가 존재한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생산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적대가 발생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적대는 생산관계에 내적이지 않다. 이는 라클라우가 적대를 생산관계가 아니라 동일성(identity)의 차원에서 파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적대는 객관화할 수 있는 모순(헤겔)이나 실재적 대립(칸트)과는 다르다.

모순의 경우에, A는 완전하게 A이기 때문에 not-A임(being-not-A)은 모순이다 -- 따라서 불가능하다. 실재적 대립의 경우에, A는 또한 완전하게 A이기 때문에 A와 B의 관계는 객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효과를 산출한다. 그러나 적대의 경우에, 우리는 상이한 상황에 직면한다: ‘타자’의 현존은 내가 총체적으로 나 자신이 되지 못하게 저지한다. 이 관계는 완전한 총체성들이 아니라 총체성들의 구성 불가능성에서 발생한다. … 적대가 있는 한, 나는 나 자신의 완전한 현존일 수 없다. 그러나 내게 적대하는 힘 또한 완전한 현존일 수 없다: 그 객관적인 존재는 나의 비존재(non-being)의 상징이며, 이런 식으로 그것의 존재를 완전한 실정성(positivity)으로 고정되지 못하게 저지하는 복수의 의미들이 흘러넘친다. 실재적 대립은 사물들 사이의 객관적 관계--즉 규정할 수 있는, 정의할 수 있는--이다. 모순도 똑같이 개념들 사이의 정의할 수 있는 관계이다. 적대는 부분적이고 불안정한 객관화를 드러내는 모든 객관성의 한계를 구성한다. 언어가 차이의 체계라면, 적대는 차이의 실패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대는 언어의 한계 내에 위치하며, 언어의 파열로서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4)

나를 나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적대이다. 적대는 나의 완전한 동일성을 가로막는 외적 타자의 현존이다. 외적 타자로 인해 나의 완전한 동일성의 실현이 방해받을 때, 나의 불완전성의 원인이 외적 타자에게 향해질 때 적대가 발생한다. 이런 적대 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칼 슈미트와 유사하게 동지와 적, 우리와 그들의 명확한 구별이다. 따라서 적대관계에서 나와 우리는 자신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외적 타자, 외부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 요컨대 적대는 동일성의 부정(negation)이다. 이런 적대는 생산관계와 내적 필연성이 없다. 동일성은 생산관계가 아니라 담론 내의 주체위치(subject-position)에 대한 동일화(identification)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그 자체로 적대적이지 않으며, 노동자가 계급적 담론 내의 계급적 주체위치와 자신을 동일화할 때 적대가 발생한다.

하지만 담론이 복수로 존재하듯이 주체위치 또한 복수로 존재한다. 예컨대 나는 자본가/노동자이고 남성/여성이고 국민/외국인 등이다. 동일성은 여러 주체위치들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내가 어떤 주체위치와 동일화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 담론들의 절합에 달려 있으며, 특히 적대를 형성시키는 담론들의 절합이 헤게모니적 실천이다. 헤게모니적 실천은 다원적인 동일성들을 등가연쇄(chain of equivalence)로 묶어내는 것이며, 등가연쇄가 창출될 때 동일성들의 변별적(differential) 성격은 붕괴한다. 차이들을 가로질러 등가를 확립하는 적대가 차이의 실패이자 언어의 파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적대관계의 두 항은 서로 상이한 담론, 상이한 주체위치와 관계하고 있으며, 따라서 언어의 객관성, 객관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대는 객관성의 한계이다.5) 이는 또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지될 수 있는 중립적인 총체화된 사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중에 라클라우는 슬라보예 지젝과 토론하면서 적대 개념을 살짝 정정한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후속 논문집인 『우리 시대의 혁명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 부록으로 실린 짧은 논문에서 지젝이 라클라우의 작업을 ‘참신한 돌파’라고 추켜세우면서도 적대 개념이 이룩한 돌파에 조응하지 못하는 주체 개념의 후퇴가 있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적대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항의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나 자신의 동일성을 획득하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다. 이미 모든 동일성은 본래 가로막혀 있으며, 불가능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외부의 적은 단순히 작은 조각, 우리가 그런 본래적이고 내재적인 불가능성을 ‘투사’하거나 ‘외화’하는 현실의 잔여물이다.6)

라클라우는 적대를 외적 분할로 파악했지만, 지젝은 그것을 내적 분할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적대는 동일성의 부정이 아니라, 부정된 동일성의 부정으로서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이다.7) 다만 사회적 적대는, 내적으로 이미 부정된 동일성을 외부의 적을 향해 투사/외화할 때 나타날 뿐이다(내적 분할의 외부화). 이는 사회적 적대에 선행하는 부정성을 함축한다. 라캉의 용법에 따르면, 이 부정성은 상징화에 저항하는 실재(the real)이다. 상징계에서 주체는 구성적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빗금쳐진 주체($)이며, 사회적 적대는 이런 구성적 결여를 외부화함으로써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지젝은 사회적 적대(동일성의 부정)와 실재로서의 적대(동일성의 부정에 선행하는 부정성)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근본적 형식에서 사회적인 것의 한계로서, 사회 영역이 구조화되는 불가능성으로서의 적대에 대한 체험과, 적대적 주체 위치들 간의 관계로서의 적대를 구별해야 한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실재(the real)로서의 적대와 적대적 투쟁의 사회적 현실(reality)을 구별해야 한다.8)

이런 비판은 적대 개념을 세공하려면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더 밀착시켜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으며, 라클라우는 지젝의 비판을 환영하면서 자신의 적대 개념과 라캉의 실재 개념을 연결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한다.9) 그러나 지젝처럼 적대와 실재를 동화(assimilation)하는 데에는 반대한다.10) 이는 라클라우가 사회적 적대를 여전히 동일성의 차원, 즉 실재가 아니라 상징계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사회적 적대에 선행하는 부정성을 탈구(dislocation)로 파악한다. 탈구는 담론이 상징계로 통합할 수 없는 사건의 발생에서 유래하는 담론의 탈안정화로서 사건과 담론의 어긋남이며, 여기서 사회적 적대는 탈구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재개념화된다. 상징화될 수 없는 사건과 그로 인한 구조적 탈구에 직면하여, 외부의 타자성을 구축하고 배제함으로써 조화로운 사회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담론적 대응이 사회적 적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외부의 타자성은 담론 및 동일성의 구성에서 배제되지만 동시에 담론 및 동일성의 구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이다.


2. 헤게모니

이와 같이 동일성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사회적 적대는 정치적 실천에 선행하는 필연적인 구조의 효과가 아니라, 오직 다양한 정치적 실천들의 우연적인 절합을 통해서만 구성되거나 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절합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헤게모니이다. 도덕적, 지적, 정치적 지도력으로 정의되는 헤게모니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을 등가연쇄로 묶어낼 수 있는 보편성을 확립함으로써 작동한다.11) 한때 보편성은 차이를 억압하고 소수성을 배제하는 범주로서 기각되었지만 라클라우는 보편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해방 정치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정론적 필연성을 갖는 선험적 보편성은 없으며, 오직 우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보편성만 존재할 뿐이다. 보편성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 미리 주어져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기의가 없는 비어 있는 기표(empty signifier)이다.
여기서 라클라우는 클로드 르포르의 민주주의 분석에 빚지고 있다. 르포르는 근대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이 권력의 장소가 비어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12) 민주주의는 근대의 사회 형식(사회를 구성하고 정당화하는 상징적 틀)인데, 구체제의 사회 형식이 ‘짐이 곧 국가’라를 말에서 드러나듯 군주라는 신체를 매개로 사회를 상징적으로 통합하는 신체 정치에 기초해 있다면, 근대 민주주의의 사회 형식은 ‘우리가 곧 국가’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국민주권에 입각하여 권력이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신체에도 귀속하지 않는 신체 정치의 거부에 기초해 있다. 아무도 권력을 독점하거나 전유할 수 없다는 원리에 따라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고유한 사회 형식은 권력을 비어 있는 장소(empty place)로 만든다. 권력의 자리가 비어 있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독점적으로 전유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경쟁함으로써 권력의 장소를 일정 기간 동안 점유하는 열린 체계이다.
하지만 라클라우는 이런 점에 동의하면서도 르포르가 말한 비어 있는 권력의 장소를 구조적 위치가 아니라 기표로 이해한다.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헤게모니 투쟁을 통해 성취하는 것은 구조 내의 비어 있는 장소가 아니라 비어 있는 기표이다.

르포르에게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장소는 비어 있다. 나는 이 문제를 다른 식으로 제기한다. 즉 문제는 바로 헤게모니적 논리의 작동으로부터 비어 있음(emptiness)을 생산하는 것이다. 나에게 비어 있음은 동일성(identity)의 유형이지 구조적인 위치가 아니다. 만일 르포르처럼 사회의 상징적 틀이 어떤 체제를 뒷받침하는 것이라면--나는 이 점에 동의한다--권력의 장소는 전적으로 비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가장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권력의 장소를 누가 점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에는 상징적 한계가 있을 것이다. [특수성에 의한 보편성의] 전적인 구현과 전적인 비어 있음 사이에는 부분적 구현을 동반하는 일련의 상황들이 존재한다. 이 부분적 구현이 바로 헤게모니적 실천에 의해 획득된 형식이다.13)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해 하나의 비어 있는 기표를 창출할 때, 그것을 통해 다양한 사회 세력들의 차별적인 요구들을 등가적으로 묶어낼 수 있다. 복수의 특수한 요구들을 등가연쇄로 연결하는 이 비어 있는 기표가 곧 보편성이다. 따라서 헤게모니를 획득하려면 한 집단의 부분적 요구는 그것을 초월하는 보편성의 기표로 작용해야 한다. 보편성은 특수성만이 채울 수 있는 공백이다. 이는 보편성이 특수성에 의존하고 있음을 함의한다. “순수한 보편성으로 작용하는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중앙의 특수주의적 핵심을 중심으로 등가연쇄를 확장시킴으로써 창출되는 상대적 보편화만 존재할 뿐이다.”14) 보편성은 보편적 대표(재현, representation)를 자임하는 특수성이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해 다른 특수한 부문들을 등가연쇄로 묶어낼 때 확립되는 특수자의 일시적 보편화이다. 어떤 하나의 특수성이 보편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변형될 때 특수성들 간에 등가관계가 수립되고 헤게모니적 관계가 형성된다. 어떤 특수성이 보편성(비어 있는 기표)의 자리를 차지하는가는 우연적인 정치적 경쟁에 달려 있다.1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구성되어 있는 헤게모니 세력이 구조 내의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것은 아니다. 비어 있는 기표는 특수성에 의해 변형되지만, 동시에 특수성 또한 헤게모니적 실천 과정에서 변형되기 때문이다.16)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젝은 이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을 제기한다. 라클라우는 주어진 역사적 지평 내에서 전개되는 우연성(헤게모니적 실천)과 이 지평 자체를 구성하는 근본적 배제(계급투쟁)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급진민주주의 전략은 궁극적으로 반자본주의 투쟁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젝 또한 특수자에 대한 보편자의 우위성을 비판하고, 그것이 비어 있는 기표에 불과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비어 있는 보편적 형식의 구성에서 어떤 외상적 내용의 배제가 일어난다고 본다는 점에서 라클라우와 다르다. “우리는 두 층위, 즉 특수한 내용이 비어 있는 보편적 개념을 헤게모니화하는 헤게모니 투쟁과 보편자를 비어 있게 하는, 따라서 헤게모니 투쟁의 영역이 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구별해야 한다.”17) 비어 있는 보편성의 구성에는 반드시 배제된 한 요소가 존재한다. 이 배제된 외부성(내부의 외부)은 보편성에 항상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따라서 완전한 총체적 보편성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특수한 내용이 보편자의 중립적 틀 속에 분할, 종적 차이를 도입한다는 흔한 통념과는 반대로, 보편자 자체는 한 집합에서 어떤 특수자--보편자 자체를 구현하도록 되어 있는--를 뺄셈하는(subtracting) 방식으로 구성된다. 보편자는 … 무수한 특수자의 다양성과 그 한가운데에서 보편자를 ‘구현’하는 요소 사이의 근본적인 분열 작용에서 발생한다.18)

이것은 헤게모니적 실천의 논리와는 달리, 보편자에 대해 모든 특수자들이 동일한 관계를 누리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모든 요소들 중에서 보편자에 대한 예외적 특이자(exceptional singular)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젝은 (보편적) 규칙에는 항상 (특수한) 예외가 있으며 이 예외는 규칙을 반증하는 게 아니라 확증한다고 하면서, 가령 “체스에는 다른 가능한 움직임들의 기본 논리에 위배되는 움직임, 즉 예외로서의 로카드(rocade)가 있다. 카드 게임에는 종종 가장 높은 조합을 뒤엎어버릴 수 있는 어떤 예외적인 낮은 조합이 있다”라는 예를 든다.19) 이 예외는 규칙에서 배제된 것이지만, 동시에 규칙 전체를 구조화한다. 그래서 지젝은 계급투쟁이 성, 인종, 생태 등 여러 특수성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동시에 보편성을 비어 있는 기표로 구성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예외적 특수성이라고 주장한다. 즉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계급 적대를 제거하는 한에서 헤게모니 투쟁의 전장이다. 따라서 진정한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는 자본주의 지평 내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이 아니라 그 지평 자체를 전복하는 반자본주의 투쟁이다.
초기에 라클라우는 적대 개념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일정하게 수용했지만, 이번에는 그도 강력하게 반발하고, 지젝이 과거의 본질주의로 회귀하고 있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한다.20) 또한 급진민주주의를 마치 좌파가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인양 지젝이 오해하고 있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우연적 결합을 고려할 경우 자유주의의 틀에 맞지 않는 급진민주주의의 수많은 형태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21) 사실 급진민주주의를 해체하려는 지젝의 비판은 라클라우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초기의 우호적인 관계가 끊어지고 라클라우와 지젝 사이에 일종의 ‘적대’가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 대신에 라클라우는 급진민주주의 전략의 정치적 주체를 인민(people)으로 제시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심화시킨다.22) 정치적 범주로서 인민은 이미 주어져 있는 집단이 아니라 복수적인 이질적 요소들로부터 새롭게 창출되는 행위자이다. 그것은 물론 사회-정치적 요구들을 등가연쇄로 묶어내는 헤게모니적 절합을 통해 가능해지며, 따라서 생산관계 차원에서 선험적으로 결정되는 행위자가 아니라 적대 전선을 확립할 수 있는, 체계에 이질적인 약자들(underdogs)이다. 인민주의(populism)는 이런 특수한 이질적 타자(구성적 외부)를 인민이라는 비어 있는 기표를 중심으로 보편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치 그 자체와 동일하다.23) 다시 말해서 인민은 포퓰루스(populus)이자 플레브스(plebs)인 바, 포퓰루스가 공동체 자체를 나타내는 총체성(totality)이라면, 플레브스는 사회 질서의 밑바닥에 있는 자들이다. 플레브스가 공동체 내의 한 부분성(partiality)이면서도 공동체의 총체성을 구현하는 포퓰루스로 스스로를 제시할 때 인민이라는 동일성을 창출하고 사회적 적대를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라클라우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와 더불어 급진적 좌파들이 ‘계급투쟁으로 돌아가라’라고 주장하는 데 맞서서 매우 일관되게 ‘헤게모니 투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다.

<각주>
1) Ernesto Laclau & Chantal Moffe, “Preface to the Second Edition”,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Toward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2nd edition), Verso, 2001, p. xi.

2)  어네스토 라클라우‧상탈 무페, 『사회 변혁과 헤게모니』, 김성기 외 옮김, 도서출판 터, 1990, 215-216쪽.

3) 알튀세르는 ‘과잉결정’과 ‘최종심급에서의 경제 결정’이라는 두 개념을 마치 한 쌍처럼 제시했지만(루이 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백의, 1997), 라클라우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 결정’이 기존의 경제환원론과 다를 바 없다고 기각하고 ‘최종심급 없는 과잉결정’만을 수용한다(『사회 변혁과 헤게모니』, 122-131쪽). 물론 과잉결정이 항상 과소결정(underdetermination)과 함께 작동한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을 고려한다면, 최종심급의 개념적 위상은 애초부터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과소결정 없는 과잉결정은 없다.” Etienne Balibar, “Althusser and the Rue d'Ulm”, New Left Review, vol. 58, 2009, p. 100.

4)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155쪽(번역은 수정).

5)  “실재적 대립은 사물들 간의 객관적 관계이며 모순은 개념들 간의 똑같이 객관적인 관계이다. 적대는 모든 가능한 객관성의 한계에 대한 경험이며 모든 객관성이 그 자신의 객관화가 부분적이고 자의적임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언어학으로부터의 직유를 사용하자면 만일 랑그가 차이의 체계라면 적대는 차이의 균열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적대는 그 자신을 언어의 한계에 위치시키고 언어의 붕괴, 즉 은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라클라우, “은유와 사회적 적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273쪽(번역은 수정). 라클라우가 들고 있는 다음의 쉬운 예를 참조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농민과 지주가 있을 때, 지주의 관점에서 농민의 담론은 완전히 비합리적이다. 농민의 관점에서 지주의 담론도 똑같이 비합리적이다. 그래서 이 두 담론 간의 공통된 기준은 전혀 없다.” A. Avgitidou & E. Koukou, “The Defender of Eventuality: An Interview with Ernesto Laclau”, Intellectum, 2008. http://www.intellectum.org/articles/issues/intellectum5/en/ITL05p085095_The_Defender_of_Eventuality_An_Interview_with_Ernesto_Laclau_Avgitdou_Koukou.pdf.

6) Slavoj Zizek, “Beyond Discourse-Analysis”, Ernesto Laclau, New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of Our Time, Verso, 1990, pp. 251-252. 이 논문은 『포스트맑스주의?』(이경숙‧전효관 엮음, 민맥, 1992)에 수록되어 있다.

7) Jacob Torfing, New Theories of Discourse: Laclau, Mouffe and Zizek, Blackwell, 1999, p. 128.

8)  “Beyond Discourse-Analysis”, p. 253.

9) New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of Our Time, p. 235. Marianne Jorgensen and Louise Phillips, Discourse Analysis as Theory and Method, SAGE, 2002, p. 42.

10) Ernesto Laclau, “Theory, Democracy and the Left: an Interview with Ernesto Laclau”, UMBA(a), 2001, p. 15.

11)  라클라우가 헤게모니 이론의 전거로 삼는 그람시는 한 집단이 경제적이고 조합주의적인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이익이 다른 종속집단들(subalterns)의 이익이 된다는 보편성을 의식하고 보여줄 수 있을 때, 그래서 모든 종속집단들의 정치적, 경제적 목표가 일치되고 지적, 도덕적 통일성이 확보될 때 헤게모니가 창출된다고 말한다.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International Publishers, 1971, pp, 181-182; 『옥중수고 I』, 이상훈 옮김, 거름, 1986, 185-186쪽. 여기서 그람시가 헤게모니 창출의 주요 조건으로 언급하는 것은 사실 (혁명) 정당으로의 결집이지만, 이에 대해 라클라우는 여전히 계급적 행위자를 특권화하고 단일한 헤게모니적 중심을 전제한다고 비판하면서(『사회 변혁과 헤게모니』, 170쪽), 특수한 사회세력이 사회의 총체성을 대표하는 보편성으로 자신을 변형시킬 때 헤게모니가 가능하다는 형식적 원리만을 수용한다.

12) Claude Lefort, The Political Forms of Modern Society: Bureaucracy, Democracy, Totalitarianism, The MIT Press, 1986; 김정한, “현실 민주주의와 정치적 행위”, 한국정치연구회, 『정치비평』 통권 제14호, 박종철출판사, 2005, 29-30쪽.

13)  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Verso, 2005, p. 166.

14)  라클라우, “구조, 역사, 그리고 정치적인 것”, 『우연성 보편성 헤게모니: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 박대진 외 옮김, 도서출판 b, 2009, 284쪽. 라클라우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여성’이라는 기표를 생각해보라. 그 기표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의미를 기표와 고립시켜 고찰하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떤 일련의 담론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은 가족, 남성에의 종속 등등과 등가성의 관계에 들어갈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 ‘흑인’, ‘동성애자’ 등등과 담론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여성’이라는 기표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회에서 그것의 의미는 헤게모니적 절합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은유와 사회적 적대」, 272쪽(번역은 수정).

15) Ernesto Laclau, “Universalism, Particularism and the Question of Identity”, Emancipation(s), pp. 34-35.

16) 라클라우, “정체성과 헤게모니”, 『우연성 보편성 헤게모니』, 108쪽.

17) 지젝, “계급투쟁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입니까? 예, 부탁드립니다!”, 『우연성 보편성 헤게모니』, 163-164쪽.

18) Slavoj Zizek,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Enjoyment as a Political Factor(2ed.), Verso, 2002, p. 44;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4, 202쪽(번역은 수정).

19)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5, 167쪽.

20) 라클라우와 지젝의 격렬한 후속 논쟁에 대해서는 E. Laclau, On Populist Reason, Verso, 2005, pp. 232-239; S. Zizek, “Against the Populist Temptation”, Critical Inquiry, 32(Spring), 2006; E. Laclau, “Why Constructing a People is the Main Task of Radical Politics”, Critical Inquiry, 33(summer), 2006; S. Zizek, “Schlagend, aber nicht Treffend!”, Critical Inquiry, 33(Autumn), 2006 참조.

21)  “The Defender of Eventuality: An Interview with Ernesto Laclau.” 하지만 라클라우는 급진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제도적 형태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런 한계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출간 직후 벌어진 ‘포스트맑스주의 논쟁’에서도 이미 지적된 바 있다. 밥 제솝, 『전략관계적 국가이론: 국가의 제자리 찾기』, 유범상 외 옮김, 한울, 2000, 423쪽.

22)  On Populist Reason, pp. 224-225.

23) 이는 라클라우가 개념화하는 인민주의가 경험적인 역사적 현상과 무관한 민주주의 정치의 형식임을 의미한다. 정인경·박정미 외, 『인민주의 비판』, 공감, 2005, 27쪽. 그러나 인민주의에 대한 논의는 사실 라클라우의 초기 저술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듯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Laclau, “Toward a Theory of Populism”, Politics and Ideology in Marxist Theory, 1977.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니코스 무젤리스, 「이데올로기와 계급정치: 라클라우 비판」, 『포스트맑스주의?』 참조.

2010/08/18 12:02 2010/08/18 12:02

오늘은 번역 글 하나를 올립니다.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그를 가장 잘 이해했던 동료 중 한 명인 에티엔 발리바르의 최신(!) 인터뷰입니다. 원문은 Étienne Balibar, “Philosophy and the Frontiers of the Political. A biographical-theoretical interview with Emanuela Fornari”(Iris, Vol.2 No.3, April 2010, pp.23~64)입니다. 이 인터뷰 전반부에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와의 작업을 회고하고 있는데, 그중 일부를 번역해 올립니다. 1960년대 초중반에 알튀세르가 직면한 정세가 어떠했는지, 그가 발리바르 및 다른 제자들과의 공동작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인터뷰입니다.
이 글의 번역은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에 「에티엔 발리바르: 도래할 시민(권)을 위한 철학적 투쟁」이라는 글을 발표하신 바 있는 장진범 선생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번역해 주신 장진범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에마누엘라 포르나리 각 병력들이 줄지어 모여드는 전장(Kampfplatz), 교전지로서 철학이라는 정의로 돌아가 보고 싶은데요, 지적하신 것처럼 이 심상은 알튀세르가 칸트에서 가져온 것이지요. 철학적 노동에 대한 이 당파적 묘사가, 종내 『자본을 읽자』 같은 책을 낳은 고등사범학교의 저 유명한 세미나에서 당신들이 함께 수행한 노동을 상징한다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에티엔 발리바르(사진) 예, 물론입니다. 우리는 매우 전투적인 형태의 정치적 담론 ― 또는 괜찮으시다면, 계급투쟁이나 당파적 정치에 관한 맑스주의적 구상의 일반화 같은 것 ― 과 고도로 사변적(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고도로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고도로 자율적인 성격을 지닌 철학적 담론의 한 형태를 끊임없이 병렬하고 겹쳐 놓는 일에 기본적인 관심을 가졌지요. 이 모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알튀세르를 편들며 치우치기 십상인 찬사를 늘어놓고 싶은 마음은 물론 없습니다만, 그의 세미나들에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본질을 지닌 목표가 있었다는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미나들에는 제도적 통제랄지 편협함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알튀세르는 젊은 시절에 겪은 특정 사건 및 경험 때문에 실로 평생을 간 정신적 외상을 입은 바 있습니다. 오늘날 이 연대기에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의 공동작업 시기 직전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즉 스탈린주의, 그 중에서도 특히 즈다노프주의 및 관련 이론인 ‘두 개의 과학’이 공식적으로 채택됨으로써 공산주의 운동에서 철학과 정치의 관계가 완전히 도착(倒錯)된 냉전 시대 말입니다.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철학을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킨 정통 맑스주의인데, 이는 중세 시대에 철학이 신학의 시녀 취급을 받았던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이 정통은 철학을 정치에 봉사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그 나름 신학의 일종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중세 신학의 폭과 깊이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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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식의 연결에 관해 토론할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질문들이 많습니다. [철학과 정치의 연결이라는] 이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이 현저하게 달랐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우리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이상화하곤 했지요. 물론 프랑스 공산당이 상속받은 전통들은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그람시의 사상이 (비록 톨리아티와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에게 이용당하긴 했지만) 사후(死後)에 영향력을 얻은 덕에 이탈리아 공산당은 환원주의의 위험, 특정 정치 노선을 위해 문화와 철학을 완전히 도구화하는 것에서 다소나마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완전히 다른 이유들도 있었는데, 이는 성격 면에서 몹시 애매하고, 그 효과가 심지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극히 양가적입니다. 예컨대 이탈리아 공산당의 경우 제3인터내셔널의 (이런 식으로 말해도 된다면) 지부로서의 공산당이라는 역할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는 19세기 동안 다른 사조들이 맡았던 국민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성격의 역할도 수행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모두는, 철학 자체에 대한 사뭇 다른 접근법을 부추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일종의 ‘노동자주의’ 관점을 채택했고, 소련 공산당이 채택한 입장들에 철두철미하게 동조했습니다. 게다가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하는 데 자신들이 누구보다 열정적이라는 점을 입증하려는 경향도 보였는데, 이는 서발턴, 또는 피지배자라고도 말할 수 있을 자들의 편에서 나타나는 고전적인 경향이지요. 이것이 두 개의 과학에 관한 당 노선, 1945년에서 1965년 사이에 예외적인 열광과 폭력, 편협한 시각과 함께 강요되었던 스탈린주의적이고 즈다노프주의적인 노선의 근원이었던 것입니다. …… 이 관점에 따르자면, 철학이란 당의 견해에 봉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지요.

제가 이 모두를 말하는 것은, 우리가 고등사범학교에 도착한 1960년 당시 알튀세르는 거의 아무 것도 공간(公刊)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등사범학교의 철학교수일 뿐이었고, 심지어는 정교수도 아닌 조교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제물을 작성하는 법을 마저 배워야 했던 그의 학생일 따름이었구요. 그는 철학사 강좌를 맡고 있었는데, 이미 눈에 띄는, 정말로 탁월한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여러 사건들이 매우 특별하게 결합했어요. 알제리 전쟁이 벌어지던 중이었고, 갑자기 맑스주의가 모든 것의 준거점이 되면서 가령 사르트르 같은 경우 이제 맑스주의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우리 시대의 지평이라고 주장했지요. 정치적인 이유로, 그게 옳았든 틀렸든 간에, 저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상당한 시간 동안 공산주의자로 남은 사람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요.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정치에 사로잡혀 있었고, 동시에 철학 교육을 좇던 젊은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잘 아시겠지요. 각자는 각자가 마주친 것들을 전유했습니다, 충분한 설득력이 있고, 무엇보다 지적인 흥미를 주는 한에서 말이지요. 알랭 바디우, 에마뉘엘 테레 등 저보다 조금 위 연배들에게는, 사르트르나 하이데거, 후설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반면 제 경우에는, 기왕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동시에 철학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주위의 많은 사람들처럼 저도 철학에서 공산주의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알튀세르를 교사로 대면한 것이 바로 이 때인데, 여기에는 사뭇 이상한 무엇, 심지어 거의 정신분열적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은 무엇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가르침은 정신분열적이지 않았지만, 그러나 절대적으로 반(反)환원주의적이었습니다. 알튀세르는 “철학을 매개 삼아 맑스주의의 주장을 예증해야 한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는 정반대로 주장했는데, 그것은 “맑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정치다”라는 것이었습니다(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이를 믿었고 이 점에서는 전혀 생각을 바꾸지 않았는데,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변치 않는 신념에는 항상 뭔가 종교적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에서 도출되는 결론이란, 변증법적 유물론이니 하는 따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물론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그저 제쳐 두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에서 옹호했던 입장이 바로 이것이었지요. 우리는 이 발상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이것들은 쓸모가 없다, 맑스주의 철학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철학에서 맑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맑스주의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제시된 모든 것들은 모든 면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신학이나 변증론(apologetics,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적․논리적 방법으로 변호하는 방법·이론을 이르는 말)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이 모두가 붕괴 지경에 이르렀음은 분명했습니다. 제20차 당대회, 스탈린주의의 종언, 기타 등등 말입니다. 당시 긴급했던 것은, 이 전통을 잊는 것, 가장 진정한(authentic) 원천들, 또는 원하신다면, 가장 전통적인 원천들 ―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후설 등등 ― 로 되돌아가 철학을 계속하되, 그 안에서 원대한 철학적 담론을 건설하는 데 쓰일 수 있는 요소들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뻔한 얘기지만 우리는 이 같은 접근에 완전히 사로잡혔는데, 이 같은 접근의 결론이 “이 담론은 후설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수준에 있어야 할 것이지만, 후설이나 하이데거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모두는 함께 일에 착수했고, 아주 집약적인 방식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의기투합해 진행한 마지막 세미나들, 특히 맑스의 『자본』에 관한 세미나에 이를 무렵에는, 정치적인 것과 이론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서로 수렴하고 들어맞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우리 모두가 믿었습니다.……

포르나리 알튀세르와 당신 및 당신 동료들의 관계가 그 본질에서 상호적이었다고 얘기하던 중이었지요. 그 전까지는 다소 암묵적인 수준에 머물던 이론적 정교화에 대해 여러분 모두가 일종의 ‘기회원인’을 제공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발리바르 예, 그런 식의 일이 1961~1962년 사이에 벌어진 건 사실입니다. 1961년 제가 학교에 입학한 직후 저와 이브 뒤루, 자크 랑시에르가 피에르 마슈레 및 우리보다 조금 연배가 높았던 이들과 친구가 되었지요. 당시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에 실린 가장 독창적인 초기 논문 모음집을 막 공간하려던 찰나였는데, 여기에는 ‘청년 맑스’와 ‘모순과 과잉결정’에 관한 논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글들이 대단한 철학적 위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맑스주의(그리고 맑스주의를 경유하는 정치의 영역)와 특정 형태의 인식론적 합리성 사이의 마주침 ― 특히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이 이 점이었습니다 ― 을 촉진시킨다고 느꼈습니다. 이 느낌에 관해 조목조목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테고, 실제로 알튀세르의 책들은 우리의 느낌을 뒷받침하지 않았지만, 당시 우리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이는 이탈리아의 갈바노 델라 볼페가 정교히 발전시킨 유의 합리주의는 아니었는데, 델라 볼페는 실증주의 전통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고, 당시 그를 잘 알지도 못했지만 알았더라도 그때의 우리에게는 별로 흥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외양상의 대립물의 특수한 결합, 이 ‘양극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 직접적으로 헤겔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근본적으로 변증법적이었던 이 결합은, 우리가 볼 때 수수께끼인 동시에 매혹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서로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알튀세르가 홉스, 루소, 로크, 콩도르세, 말브랑슈에 대해서만 강의하는 것 ― 물론 이 모두가 분명 아주 흥미롭긴 했지만 ― 은 애석한 일이다. 그의 개인적 작업은 분명 사뭇 다른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고, 우리가 볼 때 이것들이 훨씬 흥미로운데도.” 이런 생각을 품고 우리는 특별히 알튀세르를 만나러 갔습니다. 나는 이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며, 함께 갔던 사람은 뒤루, 랑시에르, 마슈레, 그리고 아마 프랑수아 르뇨(그는 후에 라캉주의자이자 극[劇] 이론가가 되었지요)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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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튀세르(좌측 사진)를 만나 맑스의 특정 텍스트들에 초점을 맞춘 세미나를 조직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때가 1961년 봄이었는데, 그가 이렇게 대답합디다. “듣게, 자네들은 일단 이번 여름 동안 맑스를 읽고 연구할 필요가 있네. 그런 후 다음 학기가 돼서도 여전히 원한다면 세미나를 개최할 수 있을 걸세.” 그는 우리에게 특히 맑스의 초기 저작들을 연구하라고 말했는데, 당시 이 저작들은 맑스주의 철학에 관한 한 토론과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지요. 저는 마슈레와 함께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에 관해 작업하느라 그해 여름 한 자락을 보냈습니다. 공동작업 결과 우리가 읽은 것에 관해 백여 쪽을 써냈고 ― 하지만 이 자료들이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 ― 10월에 돌아가 알튀세르에게 이를 제출했더니, 그가 깊은 관심을 보이며 글을 읽고는, 일이 이렇게 됐으니 기꺼이 세미나를 조직하겠노라고 하더군요. 이런 식으로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알튀세르에게 세미나 개최를 제안한 건 우리였지만, 이 제안이 알튀세르 스스로가 하고 싶었던 일과 일치했기 때문에, 세미나는 그와 우리 모두에게 생산적으로 전개됐습니다. 사실 그는 나중에 『맑스를 위하여』 모음집에 포함된 맑스에 관한 일부 글들을 계속 작성했고, 이 즈음에 글들을 한데 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미 맑스의 『자본』에 관한 보다 집단적인 세미나라는 착상을 떠올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1964~1965년에 마침내 실제로 개최되어 『자본을 읽자』라는 책을 낳게 될 세미나였습니다.……

2010/08/17 11:28 2010/08/17 11:28

『고대 대학원 신문』 1997. 5.
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캉귈렘-스피노자

- 진태원(고려대학교 HK 연구교수)


1. 잊혀진 물음: 역사유물론은 과학인가?

80년대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과학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그들에게서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전제였으며, 문제는 ‘부르주아’ 과학들’(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 특히 인문·사회과학들에 대한 그것의 우월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이 과학적 무기를 어떻게 ‘실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교조적인 정식화에 따르자면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적용’인 것처럼). 반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잊혀진 담론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자명성만이 이 사태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제시될 뿐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아마도 거의 대칭적일 두 개의 자명성을 목격하게 된다. 다만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한 자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비과학성 또는 이데올로기적 본성에 대한 자명성일 뿐이다. 이러한 대칭성의 경험은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옹호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가시기는 하지만 끝내 외면해 버릴 수는 없는, 당혹감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은 위대한 비대칭성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적 독재이지만, 또한 그것은 모든 계급적 착취와 지배를 폐지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로 삼고 있으며(특히 에티엔 발리바르, 「『공산당 선언』의 정정」, 『역사유물론 연구』 참조),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은 모든 부르주아 인문·사회과학들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비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회고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잊혀진 물음(또는 ‘억압된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이데올로기들(소위 ‘속류’ 정치경제학과 ‘과학적’ 정치경제학 모두를 포함하는)의 이데올로기적 본성을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 또는 비대칭적 과학이라면, 하지만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었다면, 이러한 본성과 경험, 원칙과 사실 사이의 괴리는, 그러한 괴리 자체의 설명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본성에 대한 물음을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은 과학, 더욱이 하나의 특권적인 과학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2. 역사유물론의 특수성: 토픽적 과학

역사유물론이 하나의 과학인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어떠한 과학인가라는 또 다른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역사유물론의 과학성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물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과학들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기준으로는 역사유물론에 대해 충분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유물론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학적 기준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식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자의 경우는 모든 과학들에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학이나 물리학 또는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필연적으로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엄밀한 의미에서 물리학이 ‘경험적인 것의 수학화’(A. Koyré, Etudes d'histoires de la pensée scientifique 참조)를 통해 성립될 수 있었다고 해서, 다른 과학들에게까지 그러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으며,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은 물리학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내적 기준에 따라 구성되고 분류되는 것이다(푸코의 인간과학들의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나 그 이전의 캉귈렘의 연구들은 과학적 기준들의 상대성을 보여주는 연구들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을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자와 같은 경우는 분명 역사유물론에만 고유한 현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전자의 경우처럼 보편화될 수 있는 성격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 모든 개별과학들의 성립이 과학철학 또는 인식론(바슐라르나 캉귈렘의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 영미 또는 독일적 전통에서 인식론은 인식주체의 심리적(또는 초월론적) 활동의 문제이지만,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에서 인식론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적 활동의 문제이다)의 일반적 원칙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역사유물론은 그 자체의 내재적인 과학적 기준을 통해 일반적인 인식론적 원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하나의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가장 일관되게 주장한 사람은 알튀세르였다. 알튀세르는 초기에는 세 개의 대륙(수학, 물리학, 역사과학)의 비유를 통해서(예컨대 알튀세르,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그리고 이후에는 역사유물론이 정신분석학과 함께 일종의 토픽적 과학(정확하게 말하자면 “분파적·갈등적 과학”)을 구성한다는 테제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부단하게 주장해 왔다. 알튀세르는 우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 과학”이자 “분파적 과학”으로서 이들의 역사는 “언제나 재발되는 분열들로 표시”(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알튀세르와 라캉』[공감, 1996] 17쪽)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과학들의 역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 과학들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기존의 이론들 내지는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공격이 가해지다가, 이것들이 점차 수용되면서부터는 바로 그 과학들 내부로 침투해서 그 과학들의 과학적 핵심을 ‘수정’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수정주의적 경향들을 통해 결국은 그 과학들 자체가 갈등적 분파들로 분열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불가피한가, 그리고 그러한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우리가 과학들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알튀세르는 전자의 질문에 대해 그러한 분열과 갈등은 바로 그 과학이 분석하는 대상이며 동시에 그 과학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현실 자체가 갈등적이라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계급사회와 같은 필연적으로 갈등적인 현실 속에서는 어떤 위치에서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명한 확인이 있다. 사람들은 갈등 자체 속에서 일정한 입장 …… 을 취한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이러한 갈등적 현실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 20~21쪽.)

그렇지만 아직도 결정적인 질문이 한 가지 더 남아 있는데, 바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의 필연성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유물론이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바로 갈등과 분열 때문에,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적 객관성을 얻는다고 말해야 한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의 갈등성이 자신의 과학성, 자신의 객관성에 대하여 구성적이라는 사실”(위의 글, 20쪽)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우리에게 긍정보다는 당혹을 안겨다 준다. 갈등성이 과학성과 객관성에 ‘구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분파적 과학이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모델 또는 원칙을 다른 과학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두 과학들은 그야말로 유별난 과학들(이것의 의미는 ‘사이비과학’에서 ‘메타과학’까지 다양하게 진동한다)인가?

알튀세르의 이러한 역설적 주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또는 과학적 활동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야말로 이론적 갈등의 원천이며, 따라서 갈등성과 객관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3.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개념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캉귈렘의 역설적인 개념, 즉 과학적 이데올로기라는 개념(Georges Canguilhem, “Qu'est-ce que l’idéologie scientifique?”, in 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 Vrin, 1988)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것이 역설적인 개념인 이유는 흔히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여기서는 서로 결합하여 모순적으로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념에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이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캉귈렘에 따르면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외재적인 방식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에 내재적이며, 과학이 갈등적이라면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서만 발전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데올로기 또는 오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전(前)과학적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이다(또는 전과학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

전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적인 천문학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천동설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어떤 과학이 인식론적 절단(coupure)을 통해 형성되면서 폐기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에 비해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과학의 성립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다른 과학의 성립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캉귈렘은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의 다양한 진화론을 들고 있는데, 일례로 허버트 스펜서는 태양계와 동물 유기체, 생명종들, 인간, 사회, 언어 등 모든 것이 연속적인 미분화를 통해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일반화된 진화법칙을 설정한다. 이러한 일반화된 진화법칙의 문제는 한정된 영역에서 설립된 진화의 개념과 그것의 논증과 실험방식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차용해 온 과학성의 규준들을 넘어 탈선”한다는 점에 존재한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후에’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다른 과학의 규준과 위신을 존중하고 그것들을 모방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종교나 마술, 허위과학, 요컨대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한정된 영역에서 타당한 규준들을 일반화하여 총체적 지식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야말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판별적 특징이 되는 셈이며,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그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새로운 과학 또는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구성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전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는가? 또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비판되고 극복될 수 있는가? 요컨대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점에서 불가피하며, 그것은 과학적 활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두 가지 상이한 영역에서의 답변들을 요구한다. 그 하나는 과학사적인 시간성, 또는 과학적 활동에 고유한 역사성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학적·사회적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전화의 노력, 즉 고유하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윤리적 능동화의 운동에 대한 것이다.

4. 상징적 질서의 아포리아들

첫 번째 문제는 철학적 구조주의(알튀세르, 푸코, 라캉)의 고유한 기여로서 구조적 역사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주체와 역사를 제거했다는 통속적 비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이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가장 심원한 역사성에 대한 개념을 가공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들의 노력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의 역사화에서 출발한다. 칸트는 초월론적 주체의 선험적 활동(통각, 선의지)을 통해 모든 인식과 실천의 가능성이 정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초월론적 주체의 활동을 역사성을 지닌 초월론적 구조, 이를 테면 상징적 질서(라캉)(또는 담론의 질서,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전위시킨다. 이 때 상징적 질서는 모든 인식과 의미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초월론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하거나 불연속적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적 초월론이라고 할 수 있다(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이를 “역사적 선험”[a priori historique]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초월론적 구조가 역사화될 경우 진리의 상대화·지식의 비객관화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식의 기준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면, 인식의 객관성이나 진리의 관념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적 연구들은 초월론적 구조들의 불연속성 또는 지식체제의 정상화(normalisation) 기능들에 대한 과도한 강조 때문에, 일종의 상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에티엔 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 ‘인식론적 단절’ 개념」, 『이론』 13호 참조).

다른 한편으로 초월론적 구조의 역사화는 “주체” 개념의 의미 변화를 동반한다. 즉 이제 주체는 모든 인식과 활동의 토대로서 주권적 주체(subjectum) 또는 초월론적 주체가 아니라, 의미의 근거로서 상징적 질서 속에 필연적으로 포섭되어 있는 예속적 주체 또는 ‘분할된 주체’(라캉)가 된다. 하지만 예속적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되는 방식은 강제적이거나 물리적 폭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예속적 주체는 인식과 행동의 자율적 주체로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된다(특히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따라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근대 철학과 더 나아가서는 근대성 일반의 원리로서 자율적 주체의 역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율적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징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편입은 동시에 지배구조의 재생산 메커니즘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율적 주체가 모든 해방운동의 근본적인 전제로 간주되기 때문에 더욱 더 치명적인 역설이다.

5. 역사적 초월론을 넘어서: 과학―해방―교통

이렇게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두 개의 심각한 아포리아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아포리아들 각자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계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순의 운동이다. 앞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토픽적 과학에 대한 테제가 하나의 역설, 또는 하나의 모순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알튀세르에게서 토픽적 과학의 과학적 객관성은 다름 아닌 그것의 내재적 갈등성과 그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캉귈렘의 과학적 이데올로기 개념 역시 그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초월론의 아포리아들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이러한 모순의 운동을 작동시킬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모순의 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좀더 분명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대칭적이라는 것, 또는 과학 그 자체가 정상화(normalisation)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과학적 진리/오류의 문제가 권력의 정상화 기능의 하위범주로 포섭된다는 것은 특히 『담론의 질서』에서의 푸코의 테제이다. 이 때문에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은 상대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의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기준 속에서만 인식되고 판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절단(coupure)과 단절(rupture) 내지는 개조(refont) 사이의 구분이 중요한데, 절단이 과학 자체의 설립의 사건을 의미한다면, 단절 내지는 개조는 과학 내부의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귀적 비판(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최초의 과학적 개념에 내재한 모순의 한 편향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은 항상 회귀적이다)과 전화의 작용을 의미한다(이것은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개념을 보완하고 정정해 주는 것이다. E. Balibar, “Coupure et refont”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참조).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의 절단을 통해 어떤 과학이 설립되는 사건은 하나의 진리의 발생사건이며, 이러한 진리는 개념 속에 물질화된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 역사유물론은 다른 어떤 과학들(이를테면 그 이전의 정치경제학들)에 의해서도 평가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자신에 고유한 진리의 공간, 과학적 객관성의 영역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장 속에서 그것들을 소재로 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비판하면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자체 내에 갈등과 모순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이후의 발전 속에서 각종의 경향들이 발생하게 되며, 이에 따라 최초의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적 계기들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적 비판과 개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조의 운동은 여전히 최초의 절단의 사건이 성립시킨 진리의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따라서 절단이라는 사건, 또는 특정한 과학적 진리의 설립 자체는 역사적으로 불연속적이지만, 이러한 과학의 역사적 구조 내부의 과정은 전진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지식의 객관성과 지식의 발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의 내재성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과학의 초월론적 구조 내에서 이데올로기화와 탈이데올로기화의 대립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E. Balibar, “Être dans le vrai? Science et la vérité dans la philosophie de Georges Canguilhem”,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따라서 우리는 단지 역사유물론이나 정신분석학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의 운동 자체가 내재적인 갈등을 자신의 객관성의 조건으로 한다는 테제를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역사유물론에 고유한 범주들(모순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유물론이 과학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토픽적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은 단지 과학의 이론적 영역 안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사회적인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의 전화를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 또는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상상(imaginatio)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만이 아니라, 욕구(appetitus)의 필연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복합적인 정서들의 모방(affective imitation)의 메커니즘(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동일화[identification]와 유비적인)의 문제를 제기한다(이에 대해서는 『윤리학』 3부 전체를 참조하고, 이에 대한 주석으로는 E. Balibar, “Spinoza, l’anti-Orwell―Le crainte des masses”, in Le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참조). 즉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계급적 조건들에 따른 인식(또는 오히려 의식)의 분할의 문제이면서, 인식과 실천에 수반되는 욕망과 공포,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등과 같은 정서적 효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항상 정서적 효과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 사물에 대한 단순한 합리적 인식만으로 그 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자동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으며, 더 나아가 그것들은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방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서 작용, 정서들의 모방의 문제는 모든 사회운동과 이데올로기들(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의 은폐된 동력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초적 장애물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인식과 실천은 단지 집단적 또는 사회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관개체론적인 관점, 즉 개인들에 내재하면서 또한 개인들을 초과하는 관계들의 인식과 전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삶의 유형들(수동적/능동적)과 결부되어 있는 인식의 유형들(상상/과학적 인식/과학적 인식의 개인적 전유)의 문제로, 그리고 두 가지 유형들의 상호전화의 필요성의 문제로 분석했다(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알튀세르의 현재성』[공감, 1996] 참조). 결국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인식의 조건과 삶의 조건의 동시적인 전화의 과학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그 자체의 존재 조건들의 전화를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특수성이 존재한다.
2010/08/16 10:41 2010/08/16 10:41

『텍스트』 2009년 5월호
자서전을 위반하는 자서전: 알튀세르의 서명과 자서전의 (불)가능성
ㅡ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재간본 서평

최정우(번역가,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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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우리에게 ‘다가왔고’ 또 우리로부터 ‘물러갔던’ 저 시간의 흔적들을 우리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중흥기’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은유적인 명명과 규정을 둘러싼 어떤 기억과 풍경들에 관해서는 모두들 그 나름으로 덧붙이거나 덜어낼 말들이 있을지 모른다. 어떤 이는 그 이론의 행보가 결코 ‘흔적’으로만 남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이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중흥’이란 개념이 도대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첫번째 반문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구조주의와 탈근대주의의 유행이 한국의 이론 지형에 그려 놓은 ‘궤적’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에 연결되고(그러므로 이는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다가온’ 적은 있지만 결코 우리에게서 ‘물러간’ 적은 없다는 반응일 터), 두번째 의문은 한국에서 언제 마르크스주의가 제대로 ‘흥성’한 적이 있었던가 하는 또 다른 반문에 가닿는다(그러므로 이는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부흥’이나 ‘중흥’ 따위의 개념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내적 ‘형성’과 외적 ‘쇄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반응일 터). 그리 짧지 않은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알튀세르’라는 고유명이 가져온 어떤 ‘절단’(coupure)은 사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담론 지형에 결코 작지 않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는 그의 글을 접한 후 다시는 그 이전처럼 마르크스주의를 사유할 수 없게 되었던 것, 바꿔 말해서, 어쩌면 그의 이후에 우리는 비로소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알튀세르는 이미 ‘잊혀진’ 존재일 수 있다. 어쩌면 알튀세르와 그의 논의들에 대한 ‘발전적 재검토’를 가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의 존재를 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이 시점에서 마치 ‘억압된 것의 회귀’처럼 찾아온 알튀세르 자서전의 재출간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L’Avenir dure longtemps)의 국역본은 그렇게 15년 만에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알튀세르의 이 자서전을 다시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광인(狂人)의 자서전’이란 어떤 개념이며 그러한 개념이 과연 ‘가능’한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는 착란 상태에서 아내 엘렌을 교살하고 금치산자 판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범죄’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았던 것. 이런 의미에서 거의 모든 자서전들이 생의 말미에 저술된다는 새삼스럽지만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말미’라고 하는 시간적 규정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의 임박을 알리는 물리적 표현인 것만은 아니다. 알튀세르에게는 금치산자로서 법적 책임을 면책당한 바로 그 시점이 어쩌면 이러한 자서전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말미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서전을 쓰는 행위는 자서전의 저자가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완결된’ 통일적 시점을 지니고 있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완결성’이 닫힌 체계로서의 어떤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완성되지 않은 완결의 시점, 통일적이지 못한 통일의 시점이 일종의 ‘전회’ 혹은 ‘일단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자서전은 삶의 기록임은 물론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회고’해 가는 일종의 수행적(performative) 죽음의 기록이기도 하다. 따라서 죽음은 한 사람의 삶에서 단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찾아올 수 있으며,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어떤 ‘죽음’ 이후에 비로소 써내려 갔던 삶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자신의 ‘죽음’을 ‘소화’하는 방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후(事後)에 작성되는 자서전은 또한 사후(死後)에 이루어지는 자서전이기도 한 것. 그러므로 자서전이란 하나의 ‘유언장’이자 ‘묘비명’이며, 그 자서전의 저자는 그러한 유언의 내용을 집행하고 증명하는 법적 주체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여기서 ‘법적’(法的)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니체는 그 자신의 자서전이라 할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의 초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의 신용으로(auf meinen eignen Credit hin) 살아간다. 어쩌면 내가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편견(Vorurtheil)일까?”(Friedrich Nietzsche, Ecce homo. Kritische Studienausgabe, Band 6, Berlin: Walter de Gruyter, 1988², p.257)

자신의 존재는 그 존재 스스로에 의해서만 가장 ‘정확하게’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숙명 혹은 오래된 편견과도 같은 환상. 자서전은 이러한 ‘치명적’ 조건을 고스란히, 그리고 가장 ‘정직하게’ 안고 가는 글쓰기의 형식이다. 작품에 대한 저자의 사법적 권리는 자서전이라는 글쓰기 장르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표현되고 인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서전의 저자는 가장 적극적인 의미에서 ‘저작권의 소유자’라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글쓰기의 ‘사법성’을 가능케 해주는 환경은,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도 잘 지적하고 있는바, ‘고유명사’의 공간, 곧 ‘서명’(signature)의 공간에 다름 아니다. 앞서 인용했듯이,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의 서문에서 자신의 “신용”(Credit)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에게 이러한 신용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이 당연한 ‘사실’을 새삼 되새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이러한 물음이 가능한 것은, 자서전에서 서명이라는 형식이 단순히 ‘안전하게 보장되는’, 곧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법성의 표현으로만 소급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광인의 자서전’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자서전 장르 안에서 ‘영원한 타자’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점을 니체는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서전이라는 글쓰기 장르 안에서 일견 지극히 당연하고 견고하게 보이던 저자의 ‘진실성’과 그 서명이 지닌 ‘사법성’은 광인으로서의 자서전 저자라는 개념에 의해서 그 근본부터 동요하기 시작한다. 왜 그런가? 바로 ‘광인의 자서전’이라는 말 안에서 — 그 권리와 정의상 — ‘광인’이라는 개념과 ‘자서전’이라는 개념이 그 자체로 서로 양립불가능한 일종의 형용모순(oxymoron)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서전의 기획과 효과가 진실성/성실성(sincérité)이라는 특이성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때, 광인의 글쓰기는 그러한 조건 자체를 만족시킬 수 없는 어떤 이질적인 것, 일반적으로 자서전을 가능케 하는 그러한 전제조건들 자체를 오히려 무화시키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는 뒤집어 말해, 자서전을 쓰는 글쓰기 행위 자체가 이미 어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그 저자의 ‘정상적인’ 사법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방증에 다름 아니다. 자서전 저자의 자격 자체가 이미 ‘법적으로’ 인가되고 또 공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기본적 자격을 규정짓는 이러한 정상성(normalité)의 기준은 자서전의 내부를 구획하는 은폐된 바깥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책이 자서전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저자의 인지도나 유명세를 떠나서 사회적이고도 사법적인 심급, 곧 저자의 정상적 상태를 이미 전제하는 어떤 기본적인 심급에서 먼저 결정된다. 자서전이 그 자신의 ‘진실한’ 이야기일 수 있으려면 우선 저자 자신이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소유하고 있는가 없는가, 즉 우리가 그의 서술을 그의 삶이 지닌 ‘진실한’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광인의 글쓰기 ‘능력’은 믿을지언정 — 때때로 광인이란 어떤 ‘문학적 천재’의 표상이기도 하므로 — 그 글이 지닌 ‘진실성’에는 의문을 품는다. 설령 그가 자칭 ‘자서전’을 썼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진실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허구적 구성물’ 혹은 하나의 ‘증상’으로 다가오기 쉽다(예를 들어 정신분석이 저 슈레버(Schreber)의 ‘자서전’을 기본적으로 어떤 방식과 태도로 다뤄 왔는지를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소위 ‘정상인’은 자서전이라는 글쓰기 안에서 이미 그 자체로 어떤 사법적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반면, 광인에게는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저자의 자격이 원천적으로 박탈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자서전 저자의 ‘사법성’이라는 문제가 지닌 ‘정상성’의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자서전 저자의 자격이라는 문제를 가장 예민하게 자각하고 있는 자서전 텍스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자서전이 요구하는 정상적인 사법성을 박탈당한 ‘자서전 저자’이며 또한 그런 저자가 되고 있다. 정신병 판정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살인죄에 대해서조차 그 자신의 ‘법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서전 저자로서 알튀세르의 ‘서명’이 저 ‘자서전의 규약’ 자체를 동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서전은 그 자체로 자서전이라는 장르와 그 저자의 서명이 맺고 있는 안정적인 ‘계약 관계’의 표면을 어지럽힌다. 자서전 저자의 이름과 그의 서명은 자서전의 진실성을 확보해 주는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장치이지만, 알튀세르는 그러한 자서전의 공간 밖에 있는 완전한 타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잃은 실종자, 서명의 권리를 잃은 금치산자, 결국 실명(實名)을 잃음으로써 사회적 실명(失明)에 이른 저자로서 우리 앞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자체로 ‘유령적’이다. 자서전 저자로서의 알튀세르는 논리적 언어와 일관성 있는 기억의 영역인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간주되는 사람, 따라서 자서전을 쓸 수 없는 사람, 곧 ‘저자가 될 수 없는 저자’라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서전은 이 실명(實名)이 실명(失明)되는 순간, 다시 말해 일견 안정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자서전과 서명 사이의 계약 관계가 파기되고 무화될 수 있는 어떤 (불)가능성의 순간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 있는 것. 따라서 나는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한다, 알튀세르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사법권과 서명의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오히려 그 자신의 자서전적 글쓰기를 감행하고 있다고.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시작부터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성’의 자서전이라는 역설적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 자서전이 하나의 ‘자서전’일 수 있는가 하고 묻는 모든 질문은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으며 바로 이 문제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재출간된 국역본에 수록된 진태원의 해제 역시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이 책이 자서전인가’ 하는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자서전’의 마지막 장(23장)이 그 이전 장들의 모든 정신분석적 설명과 해석들을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뒤엎는 ‘반전’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곧 앞뒤가 딱 들어맞는 ‘안온한’ 정신분석적 해석의 담론을 거부하고 그러한 담론을 책의 구성 자체로써 전복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서전’ 자체를 우발적 유물론에 대한 일종의 ‘수행적 글쓰기’로 보고 있다. 여기서 나는 그보다는 더 ‘외적인’ 문제,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서전에 대해 ‘외적’이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서전적 글쓰기 그 자체를 가능케 하는 어떤 ‘내적’ 논리로서의 사법성과 서명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 자신이 광인인 자서전 저자에게 남겨진 글쓰기의 전략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자신의 삶과 내면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자서전 저자의 전략과 결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한 발 더 나간다. 동시에 그러한 자서전 장르가 지닌 허구적 구성과 배치의 전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폭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은 단순히 ‘광인의 자서전’만이 취할 수 있는 배타적이고 방어적인 전략인 것만은 아니다. 정상적인 자서전 역시 일종의 ‘허구’이다. 자서전의 ‘진실성’이란 그 자서전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이며 ‘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진실성이란 저자가 자신의 삶을 통일적이고 유기적인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해 내는 한에서만 ‘진실’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서전의 진실성이란 이중적인 특성을 갖는다. 사실 자서전의 저자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동일성도 완전한 타자성도 증명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서전 저자라는 주체의 성격은 그 자체로 병리적이며 징후적이지 않은가. 자서전의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법적 대리인’이며 또한 자기 자신인 것과 자기 자신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선을 걷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자서전 쓰기는 기본적으로 바로 이러한 경계선 위에 위치하며, 또한 그 스스로 이 경계선 위에 있음을 가장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는 글쓰기이다. 말하자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저자 알튀세르는, 아직 한 번도 무덤으로 들어간 적이 없는, 하지만 동시에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온 저자인 것이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적 글쓰기가 지닌 ‘환경’은 이렇듯 유달리 고독하다. 따라서 그의 자서전이 자기변호와 자기정당성이라는 자서전의 기본적 구성요소를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복권을 시도할 뿐만 아니라 정상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자서전 안에서의 서명과 저자의 사법성이라는 첨예한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알튀세르는 특히 2장을 통해 프랑스의 형법제도 안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은 피고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서술하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아내 엘렌을 정신착란 상태에서 교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인 1장은 그 몽환적이고도 담담한 어조로 인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알튀세르는 그러한 ‘눈먼’ 살해의 원인을 어머니가 자신의 자살충동을 알튀세르로 하여금 대리수행하게 한 전이로 분석하면서, 전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신분석적 틀에 ‘딱 맞게’ 재구성하고 재배열시키는 자서전 쓰기를 수행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은 어쩌면 정신분석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설명이 아닌가: “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내게 루이(Louis)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루이, 무척이나 오랫동안 내가 문자 그대로 혐오한 이름이다. 나는 모음이 단 하나뿐인 이 이름이 너무 짧다고 여겼으며 마지막 모음 ‘이’(i)의 그 날카로운 음조는 나를 찔러 대는 것이었다. …… 또한 그 이름은 나 대신 너무 쉽게 ‘위’(oui)라고 말했으며, 나는 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내 어머니의 욕망에 대한 ‘위’인 그 ‘위’에 대해 반발했다. 그리고 특히 그 이름은 3인칭 대명사인 ‘뤼’(lui)를 말하기도 하는데, 익명의 제3자를 부르는 것처럼 울림으로써 나 자신의 모든 고유한 인격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며 내 등 뒤에 있는 그 남자를 암시하고 있었다. 뤼(lui), 그것은 곧 뤼(Louis)였으며, 내 어머니가 사랑했던 내 삼촌이지 나는 아니었다”(국역본, 65~66쪽). [번역에서는 구판본(돌베개, 1993)과 재간본(이매진, 2008)이 대동소이하다. 다만 이번 재간본이 더욱 반가운 것은 증보판의 자료들이 새로이 번역 수록되었다는 점인데, 특히나 알튀세르가 깊이 천착했던 ‘유물론 전통’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과 그 이론적 전망을 감안할 때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에 대한 노트의 번역은 그 중 가장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더불어 이 ‘정신분석적’ 자서전과의 병행 독서를 위해서라도 알튀세르의 『정신분석과 인문과학: 두 개의 강연』(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deux conférences) 이 가까운 미래에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덧붙여 둔다. 특히나 이 책의 첫 글은 알튀세르에게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서 정신분석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자신의 이름에 관한 이 일화는 알튀세르로 하여금 자서전을 쓰게 만들었던 어떤 현실적 박탈의 경험과 겹쳐진다. ‘oui’라고 말하는, 그리고 ‘lui’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욕망이 투영된 ‘Louis’라는 이름의 존재. ‘나’는 그러한 어머니의 욕망(자살의 충동)에 의해 아내를 교살하게 되고(따라서 아내 엘렌은 또한 ‘어머니’이기도 한 것), 마치 3인칭 대명사 ‘lui’가 ‘나’의 고유한 인격과 사법적 권리를 박탈했던 것처럼, ‘나’는 금치산자라는 선고 속에서 ‘내’ 자신의 욕망과 권리로는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분석은 정신분석적으로 너무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구조를 갖는 것이기에 이 자서전의 구성과 해석방식이 지극히 ‘인위적’이며 ‘주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인위성과 주관성은 그 자체로 ‘말할 수 없는 자의 말’을 가능케 해주는 핵심적인 전략에 다름 아니다.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된 저자의 자서전이 원칙적으로 진실성에 대한 보장을 결여하는 것으로밖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알튀세르는 자신의 삶을 특정한 강박의 결과물로서 재구성하고, 또한 그렇게 재구성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의도적으로’ 밝히고 적용함으로써, 표면적인 진실성과는 다른 종류의 ‘진실성’에 가닿는다.

그러한 점에서 다음과 같은 알튀세르의 말은 이 자서전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내가 오직 드러내고자 한 것, 그것은 바로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내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 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타인들도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만든 모든 정서적 감정 상태들이 던져준 충격이다”(국역본, 55쪽).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는 결국 만들어진 존재, 따라서 기본적으로 허구 혹은 가상의 존재이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가 자신의 존재를 재구성하고 그 텍스트의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정상과 비정상을 넘어 모든 저자가 갖고 있는, 그러나 대부분 그 작용을 은폐하고자 하는 ‘허구의 존재방식’, 그 자체를 스스로 폭로하고 드러내 놓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그는 독자에 대해서 오히려 가장 ‘솔직할’ 수 있는 것이며 ‘광인의 자서전’에만 고유한 특유의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서전 저자의 법적 자격이 박탈된 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글쓰기의 권리, 그것은 ‘진실’에의 권리가 아니라 ‘거짓’에의 권리, 곧 허구와 가상의 권리인 것. 따라서 자서전이 반드시 ‘표면적인’ 진실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알튀세르가 말하고 있듯이, 이 텍스트는 ‘순수한’ 자서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자서전은 ‘구성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텍스트는 오히려 온전한 ‘자서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금치산자로서의 자서전 저자에게 표면적인 진실성을 부정하는 허구의 권리를 스스로 선포하는 행위가 필요했었다면, 그에게는 같은 강도로 반대 방향에서 자신의 이 ‘자서전’이 자서전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위반의 언어’ 또한 필요했던 것. 따라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그 스스로가 자서전임을 부정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영역을 보여준다. 스스로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자신의 진술로써 비로소 자서전이 되는 책,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자서전은 다시 한 번 ‘불가능성’의 자서전이 된다. [이러한 ‘부정성’으로서의 자서전이 지닌 특성은 오히려 알튀세르 스스로가 저 루소의 『고백록』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부분에서 더욱 ‘역설적’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광인의 자서전’ 속에서 취해지는 허구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변호의 언어이며 정당성의 문법을 갖지만 동시에 그 구성의 ‘허구성’ 자체를 드러내는 허구라는 점에서 단순한 변명이나 정당화가 아닌 ‘위반’의 성격을 띠게 된다. 알튀세르는 이 자서전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구분하는 기준,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성이라는 개념 자체와 저자의 서명이 갖는 사법적 권리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적으로 ‘완전무결한’ 자서전이 그 자체로 지니고 있는 의미와 한계를 문제 삼으며, 그리고 우발성의 유물론으로 난 또 다른 길을 암시하면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단절’(rupture)을 말할 뿐이며, 또한 ‘우연한 마주침’을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렇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국역본, 360쪽)는 말은 그 말 자체보다도 더 멀리, 더 오래 지속된다. 그 말은 대미를 장식하는 결어(結語)가 결코 아닌 것이다.

오늘날 누가 알튀세르를 다시 읽을 것인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알튀세르 ‘그 자신에 의한’(par lui­-même) 하나의 전기적 텍스트로 보든, 혹은 ‘자기에 대한 글쓰기’(écriture de soi) 가 만개한 하나의 자서전적 텍스트로 보든, 혹은 개인적인 역사와 문제들을 ‘우발성의 유물론’에 대한 논의와 접합시키고 있는 이질적이고 전략적인 텍스트로 보든, 그 독서의 방식은 실로 여러 갈래로 열려 있다. 하지만 먼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알튀세르를 ‘다시’ 읽기로 결심하고 감행하는 하나의 ‘행동’이다. 이 일독(一讀)의 행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알튀세르는 오래 지속될 것이며 또한 오래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재출간을 반기는 이유이다.



2010/08/13 11:10 2010/08/13 11:10

『한국연극』 2009년 4월호
음악의 바깥, 바깥의 연극

ㅡ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과 연극음악의 ‘소격효과’

최정우(번역가, 작곡가)
 
연극을 하는 사람들 혹은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굳이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연극의 상연을 위해서나 관극을 위해서 마르크스(Marx)의 저작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죠. 여기서 제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어쩌면 이러한 독서와 관극 사이의 어떤 ‘낯선’ 관계에 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물론적’ 연극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연극 속에서 ‘유물론적’ 음악이란 또한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의 입장에서 연극에 관해 몇 편의 중요한 글들을 남기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특히 조르조 스트렐러(Giorgio Strehler)가 연출한 베르톨라치(Bertolazzi)의 연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촉발된 글인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 그리고 브레히트: 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들」(『맑스를 위하여』에 수록)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관객과 작품 사이에 어떤 거리가 생기도록 하려면 이러한 거리가 (기술적) 처리나 인물들의 심리적 양상 안에서뿐만 아니라 작품 그 자체 속에서 산출되는 어떤 방식이 필요하다. …… 의식의 환영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환영들의 실제적 조건들을 끌어내는 이러한 거리가 산출되고 형상화되는 것은 바로 작품 자체의 내부, 그 내적 구조의 역동성 안에서이다.” 흔히 우리가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지극히 ‘익숙한’ 말로 명명하고 있는 브레히트(Brecht)의 이 ‘낯선’ 기획 안에서, 관객과 작품 사이에 산출되고 또 산출되어야 할 ‘거리’란 단순히 연극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연극철학적인 어떤 것이라고, 연극의 외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내적 구조 그 자체의 역동성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알튀세르가 연극에 관한 또 다른 글인 「브레히트와 마르크스에 대하여」(『철학 정치 문집』 2권에 수록)에서 브레히트의 저 유명한 ‘소격효과’를 ‘변동/자리바꿈(déplacement) 효과’라는 번역어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자리바꿈’일까요?

이에 답하기 위해 먼저 이런 ‘낯선’ 질문을 던져 보죠: 연극음악은 ‘들리는’ 것일까요? 관객이 그 음악을 말 그대로 ‘듣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죠. 물리적으로 말해서 배우들에게도 그 음악이 ‘들리는’ 것 또한 물론입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배우는 그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존재로 상정되어 있습니다(이 점은 너무도 ‘당연하게’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 또한 우리가 매번 간과하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음악은 극의 서사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극적 구조에 관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극음악은 ‘은폐’ 속에서 역으로 어떤 ‘현시’에 가닿고, 다른 무대적 요소들과의 ‘무관계’를 통해 반대로 어떤 ‘관계성’을 획득하며, 또한 그 극도의 추상성 속에서 오히려 가장 구체적인 위치와 맥락을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음악은 연극 안에서 명시적이고 재현적인 방식으로 등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잠재적이며 징후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를 무대장치와 한 번 비교해 보죠. 무대라는 공간은 그 미학적인 구조와 형태가 아무리 ‘추상적’이라고 할지라도 언제나 일차적으로 배우가 발 딛고 서 있는 ‘물리적’ 장소로서 제시되고 경험됩니다. 음악은 이와 다릅니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은 무형의 형태를 창조하는 일종의 ‘조형 작업’, 혹은 더 수수께끼처럼 말해서, 빛을 만든다기보다는 그림자를 만드는 일종의 ‘조명 작업’에 더 근접하고 있습니다. 암전의 공간과 휴지의 시간 속에서 떨리고 울리는 음악, 빛을 등진 어둠을 타고서야 관객의 귀에 가닿는 역설적인 소리들. 반대로 우리는 극의 정서와 배우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따라가는 음악을 흔히 ‘신파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그것이 ‘신파적’인 이유는 미학적으로 ‘촌스럽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므로 ‘자리바꿈’(déplacement)이란 또한 ‘카타르시스’(catharsis)와 미학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대립되는 말이 되고 있습니다. 후자가 연극의 내부에서 그 바깥의 삶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제라면, 전자는 연극의 바깥에서 그 속의 삶과 직면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연극과 삶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대립이기도 합니다.

이에 또 하나의 ‘낯선’ 질문이 있게 됩니다: 관객은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항상 연극 안에서 또 하나의 삶을 보고 있고 또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삶‘으로서의’ 연극 혹은 삶‘에 대한’ 연극을 주창하는 저 모든 수사법들을 떠올려 봅시다, ‘연극을 통해 삶에 다가가기’라는 모토가 지닌 저 고색창연한 순진함을 말이죠). 이건 어쩌면 하나의 관성이나 타성, 혹은 본능적이라고까지 할 감정이입의 습관일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관객은 습관적으로 음악 안에서 ‘음악’을 듣고자 합니다(이것은 동어반복일 뿐일까요?). 하지만 연극음악은 음악 자체로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상정된, 하지만 관객의 ‘상상’ 속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들리는 음악.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단으로서의 관객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하지만 개개의 관객들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확실히 울려 퍼지는 음악. 우리는 ‘감각’으로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에 못지않게 ‘관념’을 통해서도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됩니다. 오히려 연극음악의 물질성은 오직 이러한 관념성 안에서만 바로 그 물질적인 성격을 획득한다는 역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음악 자체가 물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알튀세르가 브레히트의 극을 새로운 “실천의 연극이 아니라 연극의 새로운 실천”이라고 말하고 있듯이(「브레히트와 마르크스에 대하여」), 연극음악 역시 어떤 새로운 ‘음악’보다는 음악의 새로운 ‘실천’을 문제 삼는 것이며, 연극음악의 유물론적인 성격이란 바로 이러한 실천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악 안에 중심은 없습니다. 연극음악은 바그너(Wagner)의 라이트모티프도 아니지만 뮤지컬의 메인테마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니까요. 유물론적 연극 안에서 ‘주인공/영웅’이 부재하듯, 연극음악 안에서 결정적인 ‘주제악구’는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됩니다. 연극음악이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음악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연극 안에서 음악이 언제나 연극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만은 아닙니다. 연극음악은 관객에게 그 음악 바깥의 것을, 무대라는 환영의 공간 바깥의 것을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연극을 하나의 삶으로 치환하거나 연극 속에 삶을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는 일견 당연한 사실을, 중요한 것은 오히려 연극 안에서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삶의 형태와 모순들이라는 사실을, ‘들리게’ 해야 합니다. 연극음악이 들려주는 ‘음악’이란 이러한 ‘바깥의 구조’여야 하며, 음악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음악의 바깥은, 마치 연극이 연극일 뿐이라는 인식이 오직 연극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듯, 오직 음악의 ‘내부’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바깥’이기도 합니다. ‘거리’란 물리적 내부와 외부 사이에 패인 골이 아니라 ‘내부’라고 상정되었던 것을 ‘외부적’인 것으로 ‘들리게’ 하는 구조적인 틈의 힘, 곧 ‘자리바꿈’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들」의 말미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글을 이렇게 끝내고 있습니다(아니,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실로 새로운 관객의 생산이다. 공연이 끝날 때 시작하는 배우, 오로지 공연을 완수하기 위해서만 시작하는, 하지만 또한 삶 속에서 그렇게 하는 배우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관객의 모습이다.” 음악이 끝나는 시점에서 비로소 시작하는 음악, 음악의 내적 구조를 통해 오히려 그 바깥을 열고 가리키는 음악, 아마도 이 안에서 탄생할 새로운 ‘연주자/감상자’의 모습이 또한 저 “새로운 관객”의 다른 얼굴이기도 할 것입니다.


2010/08/13 11:07 2010/08/13 11:07

오늘은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1996년 출간된 『맑스를 위하여』(Pour Marx) 재판에 붙인 「서문」(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 번역을 올립니다. 번역은 진태원 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완역은 아니지만 거의 완역입니다.^^;

이 「서문」은 발리바르 특유의 정치한 논리가 빛을 발하는 글로서, 『맑스를 위하여』를 오늘날 읽는다는 것의 의미, 그의 개념들이 산출한 효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해줍니다.

Étienne Balibar, “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 in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맑스를 위하여』 재판 서문

“맑스를 위하여” ― 하나의 호소, 거의 구호에 가까운 이 제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또는 아마도 새롭게,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높고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다른 이유들 때문에, 그리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렇다. 알튀세르의 책은 이제 새로운 독자들에게 전달될 것이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예전의 독자들의 경우는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텍스트를 수용하는 방식까지도 크게 변화했다.

1965년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는 자신의 고유한 논리 및 윤리를 지닌 특정한 방법에 따라 맑스를 읽자는 선언과 동시에 맑스주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진정한 맑스주의(한 운동, 한 “당파”와 분리할 수 없는,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이론, 철학으로서)를 위한 선언이 중요한 문제였다. 오늘날의 경우는, 아마도 이 책에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또는 심지어 상상적으로 이를 재개하려고 하는 향수에 젖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돌이킬 수 없이 끝나 버린 맑스주의의 종언 이후, 맑스주의를 넘어서, 맑스를 읽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활용하고 변혁하자는 호소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 세기 이상 동안 맑스주의로 존재해 온 것에 대한, 이를 우리의 사고 및 우리의 역사와 결부시키는 복합적인 연계들에 대한 놀랄 만한 무지나 또는 보수주의적인 경멸을 용인하면서 그렇게 하자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제(foreclusion)는 늘 그렇듯이, 때로는 상반된 색조를 띠기도 하는 가상과 오류의 반복만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호소는 맑스 자신이 맑스주의와 맺고 있는 심층적으로 모순적인 관계, 이를 입증해 주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분석하려는 집요한 노력에 대한 호소다.  

사실 이 책에는 맑스주의에 이론적인 실체와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는, 저물어 가는 20세기에 이루어진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웅변적인 그리고 또한 가장 설득력 있는 논거를 지닌 시도들 중 하나가 담겨 있다. 맑스에 대한 해석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이 시도는 분명 맑스의 작업 및 그 계승자들의 “작업들”들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몰인식을 표현해 주었다(tradusait). 하지만 이 책에는 또한 ― 적어도 나는 어느 때보다도 이를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 ― 맑스의 사고양식, 또는 알튀세르가 제안한 표현에 따르면 그의 “이론적 실천”에 고유한 어떤 것이 다시 출현했는데, 이는 어떤 “맑스주의”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맑스주의의 한계들을 드러내 주는 데 기여했다. 이는 이 사고양식에 구성적인 명제들 및 아포리아들로 거슬러 올라가서 내부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더욱 더 강력한 기여였다.

이 때문에 1965년 『맑스를 위하여』의 출간(및 몇 주 뒤에는 『자본을 읽자』라는 집단 저작의 출간)이 곧바로 점화하고, 앙리 르페브르 같은 위대한 맑스주의자들 및 레몽 아롱 같은 맑스주의의 위대한 적수가 참여한 “상상적 맑스주의”와 “현실적 맑스주의” 사이의 논쟁은 오늘날 더 이상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모든 맑스주의는 상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들 중 일부, 서로 매우 다르고 사실은 매우 적은 또는 소수의 텍스트들이 대표하고 있는 몇 가지 맑스주의는 여전히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따라서 현실적 효과들을 생산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맑스를 위하여』의 “맑스주의”가 능히 이것들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

하지만 꼭 필요한 몇 가지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정보들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 기록과 그 독자들 사이에 여러 개의 가리개 ― 여러 가지 설명틀 ― 을 만들어 놓을지도 모를 “낡아빠진” 독해의 시도를 예방하고 싶다.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텍스트들은 1961년에서 1965년 사이에 출간되었다가 한 권에 묶였다는 점을 잘 알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범죄에 대한 “흐루쇼프의 보고”(1956)와 부다페스트 봉기 및 수에즈 파병(둘 모두 1956년에 벌어졌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알제리 무장 봉기 이후 드골 장군의 권력으로의 복귀(1958~1962), OECD의 창립(1960), 베를린 장벽 축조(1961) 같은 프랑스사 및 세계사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1965), 중국의 문화 혁명(1966년에 시작), 프랑스와 다른 나라(멕시코, 독일, 미국, 폴란드……)에서 68년 5월에 일어난 사건들, “프라하의 봄” 및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마찬가지로 1968년), 사회당과 공산당 사이의 “좌파 연합에 따른 공동 강령”(1972), 70년대 “유로 공산주의” 탄생, 아옌데 정권의 몰락 및 아옌데 피살(1973),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1974) ……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맑스를 위하여』의 테제들을 맑스주의 및 맑스에 대한 논쟁의 역사만이 아니라 20세기 철학사 ― 이 테제들은 이 역사 안에 아주 가시적인 흔적을 남겨 놓았다 ― 안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이 책이 1960년이라는 아주 놀라운 해 바로 다음부터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아 두는 게 유익할 뿐 아니라, 아마도 필수불가결할 것 같다. 1960년 이 해에는 메를로-퐁티의 『기호들』(「모스에서 레비-스트로스까지」 및 「마키아벨리에 대한 노트」가 수록된)과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레비-스트로스는 1962년 『야생의 사고』에서 이 책에 답변할 것이다), 질-가스통 그랑제(Gilles-Gaston Granger)의 위대한 인식론 저서 『형식적 사고와 인간 과학』 및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앙리 에(Henry Ey)가 조직한, 라캉을 중심으로 한 정신분석에 관한 본느발 회의, 마지막으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 의식』의 불어 번역(저자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이 출간되었다. 앙리 르페브르의 『일상 생활 비판』(1958, 1961)과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1961), 자크 데리다의 『후설 『기하학의 기원』 서론』 및 레비나스의 『총체성과 무한』, 하이데거의 『니체』 강의 출간은 『맑스를 위하여』의 시작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계획적으로가 아니라 “개입”이라는 우연적 기회들에 따라 『맑스를 위하여』가 쓰여지고 있는 동안, 장-피에르 베르낭의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상』(1965),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1963),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1962),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1963), 르루아-구랑의 『행동과 말』 및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론』 1권(1964), 칼 포퍼의 『추측과 논박』과 비유멩의 『대수의 철학』(1962), 그리고 또한 코이레의 『뉴턴 연구』(1965)가 잇따라 출간됐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출간된 후 곧바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1차원 인간』, 피에르 쉐퍼의 『음악대상론』, 얀켈레비치의 『죽음』, 바르트의 『비평과 진리』, 벤베니스트의 『일반 언어학의 문제들』, 푸코의 『말과 사물』, 라캉의 『에크리』, 캉길렘의 「개념과 생명」[1968년 『과학사 및 과학 철학 연구』에 재수록] 등이 뒤따랐는데, 이 모두는 또 하나의 놀라운 해인 1966년에 출간되었다. ……

요컨대 프랑스 대학의 심장부에 거주하는 프랑스 공산당의 “기층”의 투사[평당원, militant “de base”]인 한 철학자의 『맑스를 위하여』의 저술 및 출간은, 점령 기간 중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냉전이 “평화 공존”으로 역전(또는 연장)되었을 때, 탈식민화가 불가피하게 ― 하지만 항상 힘겨운 투쟁 끝에 ― 일반화된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들의 경제적 성장과 문화적 변동이 부와 권력의 분배에 대한 반대를 확대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서유럽에서 (여전히) 민족적이고 (얼마간) 사회적인 국가가 세계화로의 전환점을 준비하고 있는 반면, 동쪽에서는 스탈린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공연하거나 잠재적인 위기가 여러 가지 형태로 “혁명 속의 혁명”(레지 드브레)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처럼 보였을 때인 전후의 긴박한 정세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 두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이 책은 전쟁 직후와 관련하여 철학 논쟁이 자신의 대상 및 스타일을 바꾸고 있던 시기에 출현했다는 것을 알아 두는 것도 유익하다. 단지 “의심의 철학들” ― 그 위대한 스승은 니체이고, 부차적으로는 프로이트 내지는 “구조주의들”이다 ― , 즉 사회적 실천과 의미작용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disciplines)에게 그것들에 본래적인 과학성을 부여하려는 야심을 지닌 철학들이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푸코가 자신의 천재적인 종합적 정식화의 능력으로 곧바로 말하게 될 것처럼 “지식과 권력의” 질문들이 오랫동안 도덕과 심리학(여기에는 현상학적 심리학도 포함된다)의 질문들을 압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또한, 그리고 아마도 무엇보다도 이 시기 전체 동안 역사와 인류학, 정신분석과 정치를 관통하면서 철학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타자, 자신의 무의식, 비철학에 직면하고, 이것들과 대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철학이 당시에 추구하던 것이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비판과 자신의 재구성의 수단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분명히 바로 이것이, 모든 믿음들 및 소속들과 관련된 문제는 제쳐 둔다면, 철학이 맑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다, 이 모두는 유용하고 필수적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맑스를 위하여』는 기록 문헌(document)이 아니다. 이는 책이며, 여기에는 두 가지의 타당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이제부터 가능한 한 간명하게 그 이유들을 환기해 보고 싶다.

첫째로 『맑스를 위하여』는 용어의 강한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은 알튀세르의 철학 스타일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해 주는 것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다수의 미간행 원고들 ― 이 중 어떤 것들은 매우 이른 시기의 원고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말년의 원고들이다 ― 의 출간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이 스타일이, 고전들의 취향으로 가득차 있고 영성과 역사에 대한 관심에 푹 젖어 있는, 매우 논쟁적인 한 사춘기 소년의 펜으로부터, 그 이후에는 우수한 대학 논문을 쓴 젊은 필자로부터 쓰여진 몽상들과 에세이들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추구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중에 가면 이 스타일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그 고유한 지반 위에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려는(concurrence) 이론적 투사의 시도 속에서, 그리고 허구적인 법정에 제출하기 위해 쓰여진 검사의 구형논고이자 동시에 변론인 자서전의 고백(나는 이 주장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 속에서 사라지고, 예외적으로 번득이는 자취 속에서 엿보일 뿐이다. 하지만 『맑스를 위하여』에서 ― 이미 저 비범한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PUF, 1959; 1992년 Quadrige 총서로 재출간]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마키아벨리와 우리』[Louis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ed.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5, pp. 42-168]라는 “책”(왜냐하면 이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이 그의 책상서랍에서 그에게는 유일하게 “이론”의 영예를 얻을 만한 것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에서 ― 이 스타일은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이 책의 첫번째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는 과학의 엄밀함에 대해 말하고, 그 수사법적, 개념적 경제성을 통해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는 스타일이면서 또한 매우 예외적으로 정열적인 스타일이기도 하다. 즉 알아내기 힘든 원천들에서 체험된 그 모든 정열이 일종의 추상의 서정주의(언젠가 알튀세르가 크레모니니에 대해 “추상 회화”가 아니라 “추상적인 것에 대한 회화”라고 말하게 될 의미에서)로 표현되는 스타일인 것이다. “결과들의 힘”(「아미엥에서의 주장」)이 공언되는 이 스타일은, 원하는 모든 것을 파스칼과 루소에게, 페귀와 사르트르(이는 분명한 사실이다)에게, 맑스와 니체에게 빚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절대적으로 독특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공적인 어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이는 우리에게 글쓰기의 발명 없이는, 이 글쓰기가 “편”드는(prend le “parti”) 개념에 의한, 이 개념을 위한 글쓰기의 발명 없이는 철학 ― 추론적이든 반성적이든, 아포리즘적이든 논증적이든 간에 ― 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입증해 준다.

두번째로, 『맑스를 위하여』는 아무런 고유한 교의도 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는 주어져 있는 한 교의(또는 이론), 즉 맑스의 교의를 위해 “봉사한다.” 하지만 이 교의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적어도 체계적 서술의 형태로는 실존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화는 분명히 이 교의의 희화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는 기묘한 특수성을 보여 준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설명하듯이 구상(ébauches)과 응용, “전제 없는 결론들” 내지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작업들” 및 “실천적 작업들”에서 그 자체로 정식화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의 형태로 이를 발견함과 동시에 진정으로 이를 생산해야 한다.

즉 개념들을 명명하고 분절하고, 개념들이 그 속에 놓여 있는 테제들(사실은 물론 가설들)을 언표해야 한다.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에서 맑스로 하여금 그가 실제로 말했던 것 이상을, 그리고 그와는 다른 것을 말하게 하면서, 하지만 또한 인식론과 정치, 형이상학의 모든 영역으로 맑스에서 유래한 질문들과 통념들을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놀랄 만한 개념적 도구들의 성좌(constellation)를 생산함으로써 끊임없이 수행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알튀세르는 「서문」(「오늘날」, II, p. 24)에서 자신이 제시한 맑스 독해의 가설들을 “문제설정”(그는 이를 1963년에 죽은, 그리고 이 책이 헌정된 자크 마르탱(Jacques Martin)에게 빌려 왔다고 말한다)과 “인식론적 절단”(그는 이를 자신의 선생이었던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빌려 왔다고 말한다)이라는 주요한 두 가지 이론적 개념과 결부시켰다. 사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개념은 ― 이 개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함께 ― “알튀세르주의”의, 또는 오히려 그가 인식론 담론에 남긴 흔적의 서명 표시로 표상/대표된다. 『맑스를 위하여』의 기획에 본질적인 이 개념들은 하지만 분명히 『맑스를 위하여』의 이론적 내용 전체를 소진시키지는 않는다. 나로서는 이러한 단순화된 소개 ― 여기서는 토론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논쟁의 소재를 지적해 두는 게 문제다 ― 가 지닐 수 있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호 독립적인 통념들과 질문들로 이루어진 세 가지 성좌를 확인해 두고 싶다.

한 가지 성좌는 “인식론적 절단”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사실 이 개념에는 이론적 실천, 과학성, 그리고 관념들이나 사고들 자체가 아니라 이것의 물질적 가능성의 체계적 통일성으로 사고된 문제설정(이 개념은 아마도 하이데거의 프로블렘슈텔룽(Problemstellung)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들뢰즈와 푸코의 “문제화”(problématisation) 개념과 이를 비교해 보면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같은 개념들이 속할 만한 충분한 권리를 갖고 있다.

여기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지점인데, 이는 과학이라는 관념이 품고 있는 정서들 및 이 관념이 포함하고 있는 난점들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이 점에 관해서는 두 가지 관찰만 제시해 두겠다. 알튀세르는 상이한 자기비판들(특히 “변증법적 유물론” 또는 “이론적 실천의 이론”이 과학 담론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철학 담론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을 전개할 때에도 (『자본』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맑스의 이론이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적인 중핵을 포함하고 있다는 관념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은 반면, 맑스 이론의 과학성에 대한 관점에서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전혀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연구인 「알튀세르의 대상」[국역: 「철학의 대상: ‘절단’과 ‘토픽’」,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맑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3] 참조).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이데올로기적 가상들을 넘어) “현실적인 것으로 회귀”한다는 관념으로부터 “이론적 전유” ― 이는 동시에 과학이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이자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가상적 권력에 대한 과학이기도 하다 ― 라는 좀더 스피노자적인 관념으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맑스를 위하여』 및 후속 논문들이, 실존하는 과학성의 모델을 맑스주의적 논쟁 안으로 “수입”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또는 어쨌든 동시에) 역사유물론(및 정신분석)이 구성하는 (갈등적이면서 엄밀한) 독특한 인식의 실천으로부터 출발해서 “과학” 개념을 개조하려고 한 것인지 질문해 볼 수 있다(또한 마땅히 질문해 봐야 한다). 이 경우 “과학”이 우리에게 절단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맑스의 절단에 고유한 명증성(흄식의 감각론적 형태뿐만 아니라 헤겔식의 사변적인 형태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경험론 및 직접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이야말로 과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우리가 다시 질문해 보도록 촉구한다. 다시 말해 과학이 포함하는, 하지만 과학이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인식과 진리 효과들 자체에 관해 질문해 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공된 두번째 성좌는 구조라는 통념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통념은 분명 체계적 통일성 내지는 “총체성”이라는 관념에 준거하지만, 이 후자는 완전히 내재적인 방식으로, 또는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효과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부재하는 원인”의 양식으로 자신의 효과들 안에서 주어질 뿐이다(알튀세르는 나중에 이를 자신의 다양한 양태들 안에 내속하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비교하게 된다). 문제는 맑스 및, 그와 그 이후의 다른 맑스주의자들(특히 정세, “구체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할 때의 레닌)이 역사 안에서 발견하고 싶어 하는 인과성의 유형 자체이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다양성이 실천들의 다양성이라는 점이다. 실천들의 총화를 구조화하는 것은 실천들이 서로에 대해 작용하는 방식을 가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알튀세르는 실천들은 오직 본질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과잉결정의 양식으로 서로에게 작용한다고 말하는데, 어떤 “복잡성의 감축”도 이 과잉결정 너머에서 선형적 결정 관계의 단순성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여러 실천들 중 하나에 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 주장되면 될수록, 이와 상관적으로 이질적인 “지배”(domination), 또는 “지배작용”(dominance)의 필연성이 생겨나고, 따라서 “순수한” 경제적 경향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의 다양화가 생겨난다. 그리고 이 장애물들이야말로,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유일하고 진정한 “역사의 동력”을 이루는 계급투쟁의 소재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관점 …… 은 인문과학들의 인식론을 분할하고 있는 방법론적 “개체론”과 방법론적 “유기체론” 내지는 “전체론”에 대한 이중적 거부에 의해 부정적으로 표시된다. 따라서 이 관점은, 적어도 형태상으로는, 근원적으로 관개체적인(transindividuelles) “관계들”(“rapports” ou “relations”)의 결합으로서의 사회적인 것을 이론화하는 데서 철학적인 표현을 제공해 준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고전적인 관념론 및 유물론에 직면하여 이러한 이론화의 필요성을 깨달은 뒤, 계속 이에 관한 작업을 시도했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주관적 시간들의 분리 내지는 거리두기의 구조라는 관점에서 비범하게 소묘되고 있는 “의식”이라는 인간학적 범주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대응물로 지니고 있다. 이 논문은 책 전체의 이론적이고 기하학적인 중심이지만, 이 책에서 이 논문은 “도둑맞은 편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누구도 이를 그 자체로[즉 이 책의 중심으로] 읽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이 논문이 미학에 관한, 연극에 관한 논문이라는 부끄러운 이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알튀세르가 여기서, 궁극적으로는 역사나 역사성이 아니라, 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안에서 우연의 필연성을 사고하기 위해 ― 단지 맑스 이론의 “시작들” 및 진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 “구조”라는 관념을 활용하는 방식에 내재하는 난점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 과잉결정이라는 관념은 사건이 포함하는 예견불가능성과 비가역성의 역설적 결합과 함께 사건의 가지성에 응용되었다( …… “정세” …… ). 다른 한편으로 이는 생산양식들의 범역사적 비교에, 따라서 계급투쟁 및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경향에 응용되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이것들을 진보의 이데올로기들 및 경제주의적 진화주의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종말론에서 떼어 내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한다면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혁명들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적 이행들에 응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 아니다. 연속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모순과 과잉결정」, 「유물변증법에 대하여」라는 위대한 두 논문을 읽거나 다시 읽어 본다면, 내 생각으로는, 첫번째 논문은 사건에 대한 사고 쪽에서 과잉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비해, 두번째 논문은 경향 및 시기 구분 쪽에서 이 개념을 이끌어 낸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 하나의 관점을 다른 관점과 대립적으로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해결책은 『맑스를 위하여』에서,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구조에 대한 관념에서 이 두 관념 사이의 긴장, 또는 상호성으로서의 역사성이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은 아니겠지만, 매우 밀도 있는 논의를 확인하는 데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라는 통념 및 질문 주위에서 조직되는 성좌가 남아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 통념에서 해석학이나 역사에 대한 담론의 계보학의 주요 장애물을 발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문제에 대한 30여 년간의 토론 ― 이 역시 하나의 주기를 이루고 있다 ― 이후에, 아마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에 대해 간단히 몇 마디를 결론적으로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통념은 그의 철학적 기획 및, 담론으로서, 학문으로서 철학과 그가 맺고 있는 관계의 핵심 자체를 구성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통념은 철학이 자신의 “자기의식” ―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간에 ― 을 통과해서, 그 자신을, 그 자신이 아닌 것, 즉 사회적 실천들의 장 안에, 자신의 물질적 가능성의 조건들과 관련하여 위치시킬 수 있게 해주기(또는 가설상으로는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그 자신을 제거해 버리거나 “반영물”로 환원시키지는 않고서. 바로 이 점에서 이 통념은 알튀세르의 이론을 그의 철학적 모델들, 즉 스피노자 및 어떤 프로이트와 결합시키는 능동적인 혈통 노선을 구성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 담론의 자율성과 자족성의 이론가가 아니라 타율성의 이론가들이다. “토픽”, 즉 사고가 분석하는 갈등의 장 안에서 사고의 위치에 관한, 따라서 사고의 현실적이지만 유한한 역량에 관한 이론가들인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후에도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존재(Sein)에 대한 의식(Bewusstsein), “물질적인 실존 조건들”을 반영하고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는”(즉 추상적, 관념적인) 담론들로 표현되는 “사회적인 의식의 형태”가 아니다. 이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실존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상상적으로 영위하는 의식 및 무의식의(재/인지 및 몰인식의) 형태다. 바로 여기에 적어도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의, 특히 계급 투쟁의 연속적인 형성체들 속에서 역사적 이데올로기들(“중세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담당하는 기능의 기본적인 수준, 근본 층위가 존재한다.

이로부터 직접,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의 종언 역시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종언 또는 사회적 관계들의 투명성으로의 회귀의 다른 이름인 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괴적인 사실의 확인이 따라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알튀세르는 단지 “자신의 진영에 맞서” 집요하게 작업(그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본질적 기능들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철학자는 진영을 가져야 한다)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명백한 형태상의 모순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는 계속해서 ―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맑스를 위하여』는 오직 이를 주장하기 위해 쓰여졌다 ―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정의는 유일하게 인식 가능한 맑스주의적 정의, 어쨌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이론화와 일관된 유일한 정의이며, 이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을 보완할 수 있게 해준다. 분명(다시 한 번 내 주장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지겠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이러한 정의는 맑스 자신(엥겔스의 경우는 제쳐 두고)이 정식화할 수 있었던 정의들(특히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정반대일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의 집요한 적용은 사실은 맑스주의 이론 및 그 공언된 완결성에 대한 “해체”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가 그러한 정의야말로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아무런 어긋남 없이 “유물론적”이면서 동시에 “맑스주의적”인 철학의 지평은 점점 더 그 앞에서 멀어져 갔다.

분명 이 지점에서 알튀세르의 자기비판들에 대해 한 마디 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간략하게, 그저 독자들이 가장 특징적인 텍스트들을 참조하게 하는 정도로 그치고 싶다.

이제 우리는, 이름 그대로 지칭되든 아니든 간에, 다수의 “자기비판들”을 보게 된다. 이 자기비판들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정정하거나 와해시키고(심지어 자신을 파괴하고), 아마도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에게 복귀하려는 양가적인 성향을 표현하는데, 이는 전혀 알튀세르에게(심지어 철학자들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경우에 자기비판은 그의 실존 및 그가 이론과 맺고 있는 관계의 독특성을 비가역적으로 표시할 만큼 통상적인 비율을 넘어서는데, 이는 그의 사상의 내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주위의 끔찍한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정들이 반복되고, 또 이처럼 반복되면서 전환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또한 알튀세르 자신이 제시한 몇 가지 “길 안내”를 갖고 있지만, 이는 같은 길을 지시해 주지 않고 있으며, 이는 심지어 『맑스를 위하여』를 독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주해들 ― 이것들은 때로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 있으며, 또는 문제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 을 사상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를 텍스트의 문자에 체계적으로 투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앞에서 우리는 『맑스를 위하여』를 그 시대와 그 환경 속에서 읽어야 하지만, 이를 기록 문서로 전환시키지는 말아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재발간에서 편집자는 매우 정당하면서 신중하게도,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의 외국어 번역본들을 위해 1967년에 작성한, 그리고 거기에서 제시된 해명들 및 평가들은 프랑스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가치를 지니는 「독자들에게」라는 서문을 「후기」라는 이름으로 포함시키고 싶어 했다.

이 「서문」에 반영되어 있는 입장들(“이론주의”에 대한 자기비판, “구조주의”에 대해 거리두기, 과학과 철학의 차이에 대한, 그리고 철학과 정치, 특히 혁명적 정치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강조)은 『레닌과 철학』(1968) 및 『자기비판의 요소들』(1974)에서는 이론의 시각에서, 『입장들』(1976)이라는 논문 모음집 안의 몇몇 텍스트들(특히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및 마르타 아르네케르의 「맑스주의와 계급투쟁」)에서는 정치의 시각에서 다시 제시되고 가공된 자기비판들과 같은 것들이다. 이 자기비판들은 알튀세르 자신이 선택했던 투쟁 동지들이지만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던, 하지만 또한 이론의 고상한 시선을 위해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환기시키려고 했던 양쪽 편(프랑스 공산당(PCF)의 공산주의자들과 맑스-레닌주의 청년 동맹(UJCML)의 마오주의자들)에서 동시에 가해졌던 폭력적인 압박을 반영하고 있다.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 자기비판들은 자신의 이론적 수단들을 통해 확장된 맑스주의 이론의 장 ― 여기서는 착취 및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조건들이 “최종 심급에서 결정적이다” ― 안으로 당대의 68년 5월 및 다른 사건들을 끌고 들어가 해명하려고 했던 알튀세르의 시도를 반영한다.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자기비판들은 하나의 “실천”으로서 이론을 끝까지 사고하는 데 ― 이 시도가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 ― 는 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아무런 회고적인 진리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이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목적에 따라 생산되었고 상이한 측면들에 집중하고 있는 두 개의 또다른 “자기비판”을 지적해 두고 싶다. 하나는 「아미엥에서의 박사학위 업적 소개문」1)[1975년에 쓰였고, 1976년 에디시옹 소시알(Éditions Sociales) 출판사에서 출간된 논문 모음집 『입장들』에 재수록. 국역본으로는 『아미엥에서의 주장』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됐다]에서부터 1980년의 파국 이전이나 이후에 쓰인 매우 암시적인 또는 매우 밀도 높은 몇 개의 텍스트들(1984년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철학에 대하여』, 서관모·백승욱 옮김, 동문선, 1997]에서 나타나는, 근대의 변증론자들보다는 에피쿠로스에서 영감을 받은 “불확실성의 유물론”을 인식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암시 같은 것들)에까지 진행된다. 과소결정이라는 단어가 이전의 저작들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1975년 국가 박사학위 심사위원들에게 제출한 「아미엥에서의 박사학위 업적 소개문」이라는 텍스트에서 모순과 그에 고유한 “불균등성”에 관해 수수께끼처럼, 과잉결정은, 이것 못지않게 본질적인 과소결정이 없이는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양자가 교대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과적 결정 자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일한 구조에 양자 모두가 구성적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여기서 주석 및 보충이라는 은폐된 형태로 이루어진 자기비판을 읽어 내야 할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자기비판은 다른 것들보다 더 구성적이라는 점에서 훨씬 흥미로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비판이 제공하는 암시 ― 우연의 필연성을 “구조적으로” 해명한 이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이러한 우연의 우연성, 동일한 사건의 내부에서 공존하는 가능태들 내지는 경향들의 “과소결정된”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 는 하나의 테제나 심지어 하나의 가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적 프로그램이라는 점 역시 확실하다. ……
 
1) 이 글의 원래 제목은 “Soutenance d’Amiens”이고 국역본에서는 「아미엥서의 주장」이라고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이 글의 제목이 지닌 원래의 함의를 잘 드러내주지 못한다. 이것은 알튀세르가 1975년에 그동안 쌓은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업적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아미엥에 있는 피카르디 대학에 제출한 ‘박사 학위 업적 소개문’을 뜻한다. 이 점을 고려하여 본문에서는 이 글의 제목을 「아미엥에서의 박사학위 업적 소개문」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 심사를 받는 것을 “수트낭스”(soutenance)라고 한다.

2010/08/10 09:57 2010/08/10 09:57

루이 알튀세르 저작 목록

현재까지 출간된 루이 알튀세르의 ‘저작 목록’을 올립니다. 또한 한국어 번역본이 있을 경우에는 원서 옆에 한국어판도 표기해 주었습니다.

Montesquieu, la politique et l’histoire, PUF, 1959; réédition en coll. «Quadrige»; 『마키아벨리의 고독』, 김석민 옮김, 새길, 1992에 수록.

Pour Marx, Maspero, coll. «Théorie», 1965; réédition augmentée(avant-propos d'Étienne Balibar), La Découverte, coll. «La Découverte/Poche», 1996; 『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백의, 1996.

Lire le Capital(en collaboration avec Étienne Balibar, Roger Establet, Pierre Macherey et Jacques Rancière), Maspero, coll. «Théorie», 2 volumes, 1965; rééditions coll. «PCM», 4 volumes, 1968 et 1973; puis PUF, coll. «Quadrige», 1 volume, 1996; 『『자본』을 읽자』, 진태원 외 옮김, 그린비, 근간.

Lénine et la philosophie, Maspero, coll. «Théorie» 1969; réédition augmentée sous le titre Lénine et la philosophie(suivi de Marx et Lénine devant Hegel), coll. «PCM», 1972; 『레닌과 철학』, 진태원 옮김, 그린비(『레닌과 미래의 혁명』에 수록.)

Réponse à John Lewis, Maspero, coll. «Théorie», 1973.

Philosophie et philosophie spontanée des savants(1967), Maspero, coll. «Théorie», 1974.

Éléments dautocritique, Hachette, coll. «Analyse», 1974.

Positions, Éditions Sociales, 1976; réédition coll. «Essentiel», 1982;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XXIIe Congrès, Maspero, coll. «Théorie», 1977; 『당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이진경 옮김, 새길, 1992에 수록.

Ce qui ne peut plus durer dans le parti communiste, Maspero, coll. «Théorie», 1978; 『당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이진경 옮김, 새길, 1992에 수록.

Lavenir dure longtemps(suivi de Les faits), Stock/IMEC, 1992; réédition augmentée et présenté par Olivier Corpet et Yann Moulier Boutang, Le Livre de Poche n°9785, 1994;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이매진, 2008.

Journal de captivité(Stalag XA, 1940~1945), Stock/IMEC, 1992.

Écrits sur la psychanalyse. Freud et Lacan, Stock/IMEC, 1993; réédition Le Livre de Poche, coll. «Biblio-essais», 1996; 『알튀세르와 라캉』, 윤소영 옮김, 공감, 1996에 발췌 수록.

Sur la philosophie, Gallimard, coll. «L’infini», 1994; 『철학에 대하여』, 서관모·백승욱 옮김, 동문선, 1997.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1, textes réunis par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4.

Sur la reproduction, PUF, coll. «Actuel Marx Confrontations», 1995;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2, textes réunis par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5.

Machiavel et nous(1962~1986), Stock/Imec 1994; Tallandier 2009.

Solitude de Machiavel, présentation par Yves Sintomer, PUF, coll. «Actuel Marx Confrontations», 1998.

Lettres à Franca(1961~1973), Stock/Imec 1998.

Penser Louis Althusser, recueil d’articles, introd. par Yves Vargas, Le Temps des Cerises, 2006.

Politique et Histoire de Machiavel à Marx: Cours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1955~1972, Seuil, coll. «Traces écrites», 2006; 『정치와 역사: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록』,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근간.


2010/08/06 10:44 2010/08/06 10:44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는 20세기 최대의 맑스주의 학자이자 철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맑스를 위하여』(1965), 『『자본』을 읽자』(1965), 『레닌과 철학』(1968) 등의 저술들을 통해 맑스주의를, 나아가 철학 자체를 혁신한 사상가입니다. 그가 맑스와 스피노자, 마키아벨리 등의 사상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내놓은 이론들과 개념들, 예를 들어 이데올로기론, 구조 인과성, 과잉결정, 인식론적 절단 등은 지금까지도 인문사회과학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평생 동안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또 그 사상적 독창성 때문에 오히려 프랑스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세력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견제와 압력을 받은,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손으로 비극을 저지른 뒤 사상계라는 무대에서 퇴장한 한 명의 인간이기도 합니다.

아래에서는 루이 알튀세르의 연보를 싣습니다. 이 글은 이매진 출판사에서 출판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권은미 옮김, 2007)에 수록된 「루이 알튀세르 연보」를 토대로 이 심포지엄의 기획자이신 진태원 선생님이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진태원 선생님과 이매진 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

루이 알튀세르 연보

1918년 10월 16일 알제리의 비르망드레이스에서 아버지 샤를 조제프 알튀세르와 어머니 뤼시엔 마르트 베르제 사이에서 루이 알튀세르 출생. 어머니는 이름이 루이였던 약혼자가 전쟁에 나가 죽게 되자, 그의 형인 알튀세르의 아버지와 결혼했음.

1921년 3월 누이동생 조르제트가 태어남.

1929년 누이동생 조르제트가 성홍열에 걸리자 어머니는 두 아이를 격리시키기 위해 어린 루이를 모르방 지방의 라로슈미예에 있는 외가로 보냄.

1932~1936년 아버지가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있는 은행의 지점장으로 임명되어 모든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함. 학업 성적은 뛰어났으나 폴 드 고드마르와 절친하게 지냈을 뿐 다른 아이들과는 잘 사귀지 못함.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중도에서 그만둠. 이 시기에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부모의 결혼에 얽힌 비화)를 이모에게서 들음. 외할아버지가 사망함. 어머니의 강요로 누이동생과 함께 채식요법을 함.

1936~1939년 모든 가족이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리옹으로 이사. 파크 고등학교의 고등사범학교 입시준비반에 입학. 알튀세르는 『쿠리에 루아얄』지의 애독자로서 왕당파였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 입시준비반에서 가톨릭학생청년회 서클을 만들어 활동함. 장 기통, 장 라크루아, 조제프 우르 등 세 명의 교수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음. 입시준비 초급반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

1937년 2월 성홍열에 걸려 오랜 기간 앓다가 회복됨.

1938년 4~6월 첫번째 우울증 증세가 나타났으나 성홍열인 줄 알고 그냥 넘어감. 그해의 입학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함.

1939년 7월 윌름 가(街)에 있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문과에 합격함.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입학이 연기됨.

1940년 6월 징집되었다가 포로로 붙잡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수용소에서 지내게 됨. 조르제트가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함. 포로수용소에서 심리치료를 받기 위해 최초로 입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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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신앙의 동요와 우울증을 겪음. 로베르 달의 친구이자 조언자가 됨. 세 권의 수첩에 포로생활에 대한 일기를 기록함. 사후에 『포로 일기』(Journal de Captivite. Stalag XA, 1940-1945), Stock/IMEC, 1992라는 제목으로 출간됨(왼쪽 사진).

1945년 10월 윌름 고등사범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자크 마르탱, 조르주 스니데르, 조르주 르제브르, 마르크 소리아노와 사귀게 됨. 훗날의 아내이자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엘렌 르고시엥(일명 리트만)을 만남. 부활절에 로마에서 비오 12세를 만남.

1947년 엘렌이 레지스탕스 활동 중에 범한 과오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이 그녀의 재입당을 허용하지 않아 곤경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튀세르에게 알림. 3~5월 심각한 우울증으로 생트-안느 병원에 입원하여 전기요법에 의한 조울증 정신이상 치료를 받음. 엘렌 덕택에 병원에 수용되는 것을 모면함. 1948년 이전에 엘렌은 알튀세르의 이야기와는 달리 그의 정부(情婦)가 아니었음.

1947년 10월 가스통 바슐라르의 지도하에 「헤겔 철학에서 내용의 개념」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음.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음. 유고집 『정치·철학 저작집 1권』(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1), Stock/IMECK, 1993에 수록.

1948년 8월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2등으로 합격함.

1948년 9월 고등사범학교 철학교수 자격시험반 지도강사로 임명됨. 그의 제자로는 미셸 베레, 미셸 푸코 등이 있음.

1947~1948년 M. 몽튀클라르 신부의 교회청년회와 접촉함. 교회청년회에 가톨릭교회의 상황과 관련해서 「사실의 문제」(『교회청년잡지』 10)라는 글을 투고함. 그는 비록 프롤레타리아의 해방과 신앙을 혼동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심을 잃지 않았음. 매우 '청년 맑스'적이었음.

1948년 11월 누이동생과 함께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1980년까지 당을 떠나지 않음. 그는 엘렌을 재입당시키려 했으며, 이 일에 장 투생 드장티, 빅토르 르뒥, 클로드 알팡리드 등을 개입시킴.

1948~1949년 철학교수 자격시험반에서 플라톤에 대해 강의함. 리센코 사건이 터져서 생물학자인 엥겔만이 자살함. 6월 정신분석가인 로랑 스테베닌으로부터 정신분석을 받기 시작함. 알튀세르의 영향으로 고등사범학교에 폴리체르 서클이 만들어짐.

1950년 라지크 사건과 관련해서 에마뉘엘 무니에와 절교하고 즈다노프에게 열렬한 경의를 표하는 내용의 72페이지에 달하는 편지를 장 라크루아에게 보냄. 그의 여자친구인 엘렌이 평화운동에서 축출되는 곤경에 처하게 됨. 고등사범학교의 공산당 조직이 그에게 그녀와 헤어지도록 압력을 가함. 처음에는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곧 이를 거부하고 매우 은밀하게 엘렌을 계속 만남.

1953년 8~10월 연구계획인 「맑스주의에 대하여」(Sur le marxisme) 외에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한 노트」(Note sur le matérialisme dialectique)를 『철학교육평론』(Revue de l'enseignement philosophique)지에 기고함(『정치·철학 저작집 1권』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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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55년
철학교수 자격시험반에서 18세기의 역사관(몽테스키외, 루소, 콩도르세, 엘베시위스)에 대해 강의함. 이 당시의 강의록 및 기타 강의록을 묶은 『정치와 역사. 마키아벨리에서 맑스까지의 정치철학 강의록』(Politique et Histoire, de Machiavel à Marx : Cours à l'Ecole normale supérieure de 1955 à 1972)이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2006년에 유고집으로 출간됨(왼쪽 사진).

1955년 4~5월 「역사의 객관성에 관하여: 폴 리쾨르에게 보내는 편지」(Sur l'objectivité de l'histoire: Lettre à Paul Licoeur)를 『철학교육평론』지에 발표함으로써 두번째로 철학 문제에 중요한 개입을 함(『마키아벨리의 고독』[La Solitude de Machiavel]에 재수록).

1955년 9월 라마튀엘르에서 클레르라는 여자를 만남. 이듬해 봄에 격심한 우울증으로 샤트네에 있는 발레-오-루 병원에서 치료를 받음.

1957년 누이동생 조르제트가 아들을 출산했으나, 그녀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그녀의 아들은 외조부모에 의해 양육됨. 그해 가을 알튀세르는 자신의 친구인 장 프랑수아 르벨의 책 『왜 철학자들인가?』를 공개적인 논쟁에서 옹호함.

1958년 엘렌이 자료조사원으로 세데스 출판사에 들어감. 그녀는 그곳에서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농촌 사회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며, 이어서 P. 나빌과 함께 노동문제 조사작업을 진행함.

1959년 9월 장 라크루아가 책임 편집을 맡은 총서 가운데 한 권으로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Montesquieu, politique et histoire), PUF, 1959를 출판함.

1960년 1~2월 철학교수 자격시험반에서 루소에 대해 강의하다가 중단함. 에마뉘엘 테레와 알랭 바디우는 알튀세르의 병을 알아차림.

1960~1961년 고등사범학교 문과에 에티엔 발리바르, 크리스티앙 보들로, 레지스 드브레, 이브 뒤루, 자크 랑시에르가 입학함. 알튀세르는 알랭 바디우가 조직한 사르트르에 대한 학술대회(주제는 '역사에서의 가능성')에 참가함.

1960년 12월 포이어바흐 저작 선집인 『포이어바흐의 철학 선언』(Manifestes philosophiques: Textes choisis, 1839-1845), PUF, 1961을 장 이폴리트가 책임 편집을 맡은 '에피메테'(Epiméthée) 총서로 번역 출판함.

1961년 3~4월 「청년 맑스에 대하여 ― 이론의 문제들」을 『사상』(La Pensée)지에 기고하였는데, 당내에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킴(『맑스를 위하여』에 수록).

1961년 여름 라벤느 부근에 머뭄. 그는 레비-스트로스를 이탈리아에 번역·소개한 프란카 마도니아라는 여자를 만남. 클레르와 절교함. 프란카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사후에 『프란카에게 보내는 편지들』(Lettres à Franca [J961-J973]), eds. François Matheron and Yann Moulier Boutang, Editions Stock/IMEC, 1996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1961년 가을 고등사범학교에서 청년 맑스에 관한 세미나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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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를 위하여』(왼쪽), 『『자본』을 읽자』(오른쪽) 원서 표지

1962~1963년 고등사범학교에서 구조주의에 대하여 세미나를 함. 12월 「모순과 과잉결정. 연구를 위한 노트」를 『사상』지에 기고하였는데(『맑스를 위하여』에 수록), 이 논문도 앞의 논문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비판을 야기시킴.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 ― 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를 『에스프리』(L'Esprit)지에 발표함(『맑스를 위하여』에 수록). 1963년 2월 「1844년 수고(手稿)」를 『사상』지에 발표하였는데(『맑스를 위하여』에 수록), 이 논문에서 그는 『수고』의 불어 번역 출판을 치하하고 이 글의 전환점격인 성격을 높이 평가함. 6월 『철학교육평론』지에 발표한 「철학과 인문과학」(Philosophie et sciences humaines)에서 라캉을 격찬함(『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재수록). 8월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하여-기원들의 불평등에 대하여」를 『사상』지에 발표함(『맑스를 위하여』에 수록). 9월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자크 마르탱이 자살함. 마르탱의 정신분석가이자 자신의 정신분석가였던 로랑 스테베닌 과 결별함.

1963~1964년 구조주의 관한 세미나를 계속했는데, 정신분석학 쪽으로 경도됨. 이 당시에 했던 두 개의 강의가 『정신분석과 인문과학: 두 개의 강의』(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LGF/IMEC, 1996으로 출간됨.

1963년 10월 「맑스주의와 인간주의」(『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이론적 반(反)인간주의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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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월 15일 그의 주선으로 라캉(오른쪽 사진)이 고등사범학교로 세미나 장소를 옮김. 1월 알튀세르는 「학생 문제」를 『신비평』지에 발표하였는데(“Problèmes étudiants”, in La Nouvelle critique), 그는 이 글에서 학생급료 요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함(『정치·철학 저작집 1권』에 재수록). 2월 『사상』지에 발표된 피에르 마슈레의 「조르주 캉길렘의 과학철학」(La philosophie de la science de Georges Canguilhem)이라는 논문에 소개말을 씀. 여름 고르드에 집을 구입함. 7~8월 엘렌이 알튀세르의 가족사를 해석하는 편지를 보냄. 자신의 누이동생을 살해하는 꿈을 꾸는데, 이것은 1980년에 일어난 아내 교살과 일치함.

1964~1965년 고등사범학교에서 『자본』에 대해 세미나를 함. 알튀세르, 에티엔 발라바르, 피에르 마슈레, 자크 랑시에르, 로제 에스타블레, 자크-알랭 밀레가 발표를 함. 1964년 봄 르네 디아트킨에게서 정신분석을 받기 시작함. 1965년 9월 『맑스를 위하여』(Pour Marx)를 알튀세르 자신이 책임 편집하는 프랑수아 마스페로 출판사의 '이론' 총서 가운데 한 권으로 출판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둠. 11월 알튀세르, 발리바르, 마슈레, 랑시에르, 에스타블레 공저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를 출판함. 12월 심각한 우울증에 빠짐.

1966년 8월 「추상의 화가 크레모니니」(Cremonini, peintre de l'abstrait)를 『새로운 민주주의』(Démocratie nouvelle)지에 발표함(『정치·철학 저작집 2권』에 재수록). 가을 「문화혁명에 대하여」(Sur la Révolution culturelle)를 『맑스-레닌주의 평론』(Cahiers Marxistes-Léninistes)지에 익명으로 발표하였는데(이 논문의 프랑스어 원본 및 영어 번역본은 인터넷에서 참조할 있다. 바로가기), 그는 이 논문의 필자라는 것을 오랫동안 부인했음.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Pour une théorie de la production littéraire)가 '이론' 총서로 출판됨. 가을 '장 자크 루소가 사고할 수 없었던 것'(L’impensé de Jean-Jacques Rousseau)이라는 주제의 『분석 노트』(Cahiers pour l'analyse) 제8호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관하여(균열들)」(Sur le Contrat Social[Les décalages])이라는 논문을 발표함(『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재수록). 고등사범학교에서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해 세미나를 함. 이 세미나 처음 부분에서는 포이어바흐를 다룸.

1967년 5월 1일 레지스 드브레에게 드브레가 『혁명 속의 혁명』에서 발전시킨 개념에 관한 편지를 보냄. 11월 '과학자를 위한 철학강의'를 시작함. 알튀세르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함. 노벨상 수상자인 자크 모노가 개회강연을 참관함.

1968년 2월 1일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을 『루니타』지에 발표함(『아미엥에서의 주장』에 재수록). 마리아 안토니에타 마치오키와 인터뷰함. 2월 3일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이탈리아 공산당의 마치오키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함. 이 12통의 편지는 책으로 엮여 1969년 5월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내부로부터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판됨. 2월 프랑스 철학회에서 '레닌과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함. 5월 바리케이드의 밤 다음날 오-비브 병원으로 가서 여름 내내 그곳에서 지냄. 가을 알랭 바디우가 알튀세르와 결별함.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마오주의자들과 프랑스 공산당 간의 대립이 폭발함. 9월 엘렌이 윌름 가에 있는 알튀세르의 아파트에 입주함. 11월 6월에 사망한 모리스 메를로-퐁티를 '살아 있을 때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불러 파문을 일으킴.

1969년 3월 15일 마리아 안토니에타 마치오키에게 12번째의 마지막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서 프랑스의 5월 사태를 유럽에서의 문화혁명으로 규정함. 5월 에마뉘엘 테레의 『'원시' 사회에 직면한 맑스주의』(Le Marxisme devant les sociétés "primitives") 및 미셸 피샹, 미셸 페쇠의 『과학의 역사에 관하여』(Sur l'histoire des sciences)가 '이론' 총서로 출판됨. 6월 「'5월 학생사태'에 관한 미셸 베레의 논문에 대하여」를 『사상』지에 발표하여 자신의 옛 제자이자 친구인 미셸 베레의 입장을 반박함.

1970년 마치오키의 『이탈리아 공산당 내부로부터의 편지』가 알튀세르의 편지가 제외된 채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불역 출판됨. 고등사범학교에서 이루어지던 라캉의 세미나가 학장의 반대로 중단됨. 알튀세르는 여름 내내 우울증에 시달림. 6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연구를 위한 노트」가 『사상』지에 발표되었는데, 이는 선언적인 성격의 논문이었음(『아미엥에서의 주장』에 재수록).

1970~1971년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홉스에 대해 강의함. 1971년 봄 리튬 치료를 받음.

1971년 5월 마르타 아르네케르의 책 『역사유물론의 기본 개념』(21세기 출판사)에 서문 「맑스주의와 계급투쟁」을 써 줌(『아미엥에서의 주장』에 재수록). 크리스티앙 보들로와 로제 에스타블레의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 학교』(L'École capitaliste en France)가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출판됨.

1972년 7월 25일 및 1972년 8월 1일 철학교수 자격시험을 보이콧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을 『신 프랑스』(Nouvelle France)지에 게재함.

1972~1973년 마키아벨리에 대해 강의함. 1972년 가을 알랭 바디우의 『모델의 개념』(Le Concept de modèle)이 '이론' 총서로 출판됨. 1973년 4월 도미니크 르쿠르의 『하나의 위기와 그 쟁점. 철학에서 레닌의 위치에 대한 에세이』(Une Crise et son enjeu: essai sur la position de lénine en philosophie)가 '이론' 총서로 출판됨(『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 이성훈 옮김, 백의, 1996에 수록). 6월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Réponse à John Lewis)이 출판됨(『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재수록). 자크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판. 이 책은 '제자에 의한 스승 살해'라는 평을 받음.

1973년 10~12월 수면요법을 받기 위해 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함.

1974년 4월 베지네에 있는 병원으로 옮김. 8월 헤겔 협회의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엘렌과 함께 여행함. 중국 방문을 취소함. 9월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인 철학』(Philosophie et philosophie spontanée des savants, 1967)을 '이론' 총서의 '과학자들의 자생적인 철학' 시리즈로 출판함. 『자기비판의 요소들』(Éléments d'auto-critique)을 아셰트(Hachette) 출판사의 문학 총서로 출판(『마키아벨리의 고독』에 재수록). 10월 에티엔 발리바르의 『역사유물론 5연구』(Cinq études du matérialisme historique)가 '이론' 총서로 출판됨(부분 국역, 『역사유물론 연구』, 이해민 옮김, 푸른산, 1989). 10월 12일자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L'Humanité)지에 제20차 당대회에 대한 알튀세르의 기고문 「새로운 무엇」이 게재됨.

1975년 6월 28일 아미엥에 있는 피카르디 대학에서 「철학에서 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인가? 아미엥에서의 박사학위 업적 소개문」(『아미엥에서의 주장』에 수록)을 발표하고 그동안 발표한 여러 업적들에 의한 업적 박사학위를 받음. 7월 18일 아버지 샤를 알튀세르가 89세의 나이로 사망함. 가을 엘렌이 은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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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 에디숑 소시알(Éditions sociales) 출판사에서 그의 주요 논문들을 모은 『입장』(Positions)을 출판함(『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 1991). 2~3월 엘렌과 함께 스페인을 여행함. 그라나다 대학에서 '철학의 전화'라는 주제로 강연함(「철학의 전화」, 『역사적 맑스주의』, 서관모 엮음, 새길, 1992). 4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포기에 반대함. 6월 트빌리시의 학술대회를 위해 레옹 쉐르톡에게 보낸 「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을 집필함(Écrits sur la psychanalyse. Freud et Lacan, Stock/IMEC, 1993에 수록; 국역본, 『알튀세르와 라캉』, 윤소영 엮음, 공감, 1995). 에티엔 발리바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Su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가 '이론' 총서로 출판됨(『민주주의와 독재』,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10월 도미니크 르쿠르의 『리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재적 역사』(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가 '이론' 총서로 출판됨. 여기에 「종결된 역사, 종결될 수 없는 역사」라는 제목의 서문을 씀. 11월 12일 1948년부터 교제해 온 엘렌(왼쪽 사진)과 결혼함. 12월 소르본 대학 철학과 공산주의자 학생 서클의 초청을 받아 강연함.

1977년 5월 1976년 12월 소르본 대학의 강연원고인 『제22차 당대회』를 출판함(XXIIe Congrès, Maspero, 1977; 국역본 『당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 이진경 옮김, 새길, 1992에 수록). 6월 파리의 정치학 연구원에서 마키아벨리에 대해 강연함. 11월 미셸 루와의 『루쉰. 팜플렛과 소책자(1925~1936)』가 '이론' 총서의 새로운 시리즈로 출판됨. 베니스 학술대회(주제는 '혁명 이후 사회에서의 권력과 저항 세력')에서 '마침내 맑스주의의 위기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함(『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Ⅰ』, 이병천·박형준 옮김, 의암, 1992에 수록).

1978년 4월 25~28일 『르몽드』에 「공산당 내에서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것」(Ce qui ne peut plus durer dans le parti communiste)이라는 연속기고문을 게재하였는데(『당내에 더 이상 지속되어선 안 될 것』에 수록), 이 논문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시기가 알튀세르의 정치적 영향력의 절정기. 7월 고르드의 집을 매각함.

1978~1979년 로베르 리나르의 노동그룹학교에서 열리던 세미나에 알튀세르 부부는 여러 차례 참가하였는데, 특히 엘렌이 연구 중이던 포(Fos) 지역과 관련된 세미나에 자주 참석함. 2월 피에르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Hegel ou Spinoza)가 '이론' 총서로 출판됨(『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0).

1979년 10월 3일 니코스 플란차스가 자살함. 알튀세르는 국제 맑스주의 정치학 연구센터의 회의를 여러 차례 개최함.

1980년 2월 고등사범학교에서 맑스를 '뜯어 맞추는'(bricolage) 문제에 관해 강연했는데, 이는 1974년의 자기비판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자기비판이었음. 3월 라캉이 자신의 학회를 해산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여 강연하면서 라캉을 "멋들어지기는 하지만 가련한 어릿광대"라고 칭함. 4월 이탈리아로 여행함. 테르니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사회주의는 똥이다'라는 발표를 함. 4월 28일 열공 탈장(裂孔脫腸) 수술을 받음. 엘렌이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털어놓음. 알튀세르는 몽수리 공원 부근의 병원에 입원하여 9월까지 머무름. 10월 15~20일 엘렌과 함께 남부 프랑스에 있는 이나 살로몽의 별장에서 일주일을 보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살 혹은 동반자살에 대하여 부부 간에 끊임없이 상호 협박을 가함. 11월 16일 일요일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엘렌을 교살함. 그는 곧장 고등사범학교의 의사인 P. 에티엔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에티엔은 엘렌의 사망을 확인한 후 그를 입원시킴. 11월 25일 엘렌은 바뇌의 유대인 묘지에 매장됨.

1980년 11월~1981년 7월 생트-안느 병원 로 교수 담당 병실에 강제 수용됨. 2월 1일 그의 여자친구 프란카가 파리에서 사망함. 2월 면소 판결을 받고, 후견인의 보호하에 놓이게 됨. 7월 오-비브 병원으로 옮겨짐.

1982년 10월 뤼시엔 뢰벵 가(街)의 새로운 거처로 돌아옴.

1983년 2월 수와지 병원에 다시 입원함. 친구와 친지들이 방문함. 10월 10일 미셸 페쇠가 자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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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Althusser, 1918~1990)

1983년
가을~1984년 봄 멕시코의 철학자 페르난다 나바로 여사와 대담을 하는데, 이 대담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출판된 최후의 것임.

1985년 3~5월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집필하여 초고를 몇몇 친지들에게 보여 줌.

1985년 여름~가을 수와지 병원에 입원함.

1986년 편집증 증세가 나타남. 자신의 옛 친구들을 많이 부름. 6월 수와지 병원에 다시 수용됨. 8월 1일 어머니 뤼시엔 알튀세르가 사망함. 10월 전기작가 얀 물리에 부탕과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만남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됨.

1987년 1~3월 수와지 병원으로 돌아감. 5월 식도절제 수술을 받음.

1988년 1월 수와지 병원으로 옮겨짐. 이어서 베리에르 병원으로 다시 옮겨짐. 멕시코에서 페르난다 나바로의 『철학과 맑스주의. 알튀세르와의 대담』(21세기 출판사)이 출판됨(『철학에 대하여』, 서관모·백승욱 옮김, 동문선, 1997에 수록). 엘렌의 삶과 그녀가 프랑스 공산당에서 종신제명된 실제 이유에 대해 전기작가와 대화를 나눔. 12월 『현대』(Les Temps modernes)지에 에티엔 발리바르의 「알튀세르여, 계속 침묵하십시오!」라는 논문이 게재됨(『루이 알튀세르: 1918~1990』, 윤소영 엮음, 민맥, 1991에 수록).

1990년 건강상태가 계속 악화됨. 6월 요양원에 수용된 알튀세르는 음식물을 거부함. 폐렴으로 치료를 받음. 8월 말 베리에르에 있는 MGEN의 노인병원으로 옮겨감. 심한 욕창과 빈혈로 고통받음. 10월 22일 심장쇠약으로 사망함.

2010/08/05 09:54 2010/08/05 09:54

반폭력의 문제설정과 인간학적 차이들
에티엔 발리바르의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

 서관모 (충북대학교 사회학과)


에티엔 발리바르의 이론적 전화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아나키즘을 비판하고, 국가 사멸의 기획을 국가의 발본적인 민주적 전화의 기획으로 대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을 유지하면서 알튀세의 구조적 인과성 도식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역사적 인과성 도식을 제출한다. 그는 폭력 그 자체의 폭력적 폐지로서의 혁명적 정치의 아포리아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아포리아에서 출발하여 정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극단적 폭력들에 대해 성찰하고, ‘반폭력(anti-violence)’의 문제설정 위에서 ‘시민인륜(civilit)의 정치’(또는 시민인륜으로서의 정치) 개념을 가공한다. 그는 소유 및 영유라는 마르크스의 범주에 인간학적 차이들이라는 범주들을 추가하여 추구해야 할 시민성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정의를 제출하고, 그 연장선에서 독자적인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 상을 제시한다.

용어: 이론적 아나키즘, 반폭력, 인간학적 차이, 시민인륜, 공산주의.

1. 도입

마르크스주의의 발본적 쇄신을 통한 유효한 재구성 작업이 절박한 과제로 제기된 지 오래이지만 이 작업에서 중대한 진전을 이룬 이론가는 손에 꼽을 만하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그러한 이들 중의 하나인데, 루이 알튀세를 넘어서서 중요한 독자적인 이론적 진전을 이룬 1990년대 이래의 그의 작업은 단편적으로만 소개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계급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학적 차이들’을 이론에 도입하고 ‘반폭력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정치의 개조’ 작업을 수행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상을 소묘하는 발리바르의 진행 중인 작업의 개요를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그의 용어, 개념, 테제들을 그가 제시한 그대로 충실히 인용하여 정확한 소개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발리바르의 정치의 개조의 문제설정은 마르크스적인 ‘변혁(transformation)의 정치’와 전(前)마르크스적인 ‘해방(mancipation)의 정치’, 그리고 포스트마르크스적인 ‘시민인륜(civilit)의 정치’의 절합(節合)이라는 도식으로 구체화된다. 이 도식이 제출되기에 이른 맥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마르크스적 정치 개념의 핵심적 곤란의 하나를 이루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아나키즘’이라는 쟁점에서 소개를 시작할 것이다. 이어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알튀세의 구조적 인과성 도식을 벗어나는 발리바르 자신의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과 발리바르가 독자적으로 제출하는 반폭력의 문제설정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국제주의의 오늘의 형상이라는 쟁점, 그리고 평등의 확립(institution)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의 유형인 인간학적 차이들이라는 쟁점들과 관련하여 제출하는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할 것이다.


2. 국가의 사멸에서 국가의 발본적인 민주적 전화로

1968년 혁명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의 종래의 형상은 종언을 고하며, 1989년 ‘국가 공산주의’도 종언을 고한다. 발리바르는 1970년대 말부터 알튀세의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는 독자적인 이론작업을 수행한다. 그의 이러한 이론적 진화는 마르크스주의의 ‘국가 사멸’의 기획을 국가의 발본적인 민주적 전화(transformation)의 기획으로 대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한편으로는 국가의 종언,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관계의 종언과 동일시한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공산주의관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정식이다.1) 이러한 마르크스적 공산주의는 1936년의 소비에트 헌법에서, 그리고 1976년 프랑스공산당 22차 당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각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사멸했다.2) 발리바르(1992a)는 ‘현실 사회주의’를 ‘국가 공산주의’로 명명한 바 있거니와3) 마르크스의 ‘반국가주의적’ 공산주의관에 비추어 이 국가화된 공산주의는 얼마나 기괴한 괴물인가! 마르크스적 ‘반국가주의’의 관점에서 이러한 사회주의적 국가주의를 비판하고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적 국가주의와 관련한 이론적 곤란의 원천은 마르크스 자신에게 있다. 그는 국가주의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아나키즘과도 구분되는 자신의 담론을 결코 안정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4)
마르크스의 국가 사멸의 기획, 즉 계급투쟁을 통한 계급적대의 전진적 소멸, 그리고 국가의 전진적 ‘사멸(Absterben)’의 기획은 아나키즘(특히 아나코생디칼리즘)의 국가 폐지(abolition)의 기획과 분명히 구별된다. 그러나 이 두 기획의 차이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양자는 국가와 정치의 종언이라는 핵심적인 관념을 공유한다. 단적으로, 바쿠닌이 마르크스의 국가주의(“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할 때에 마르크스는 진정한 의미의 아나키라 칭할 만한 것을 원용하는 것(마르크스·엥겔스, 1872: 148) 외에 다른 수단을 갖지 못했으며, 바쿠닌을 비판하는 마르크스의 논리는 바쿠닌의 논리를 전도시킨 것일 뿐이다. 자본을 국가의 산물로 간주하고 자본의 철폐를 국가의 철폐의 결과로 간주하는 바쿠닌과 반대로 마르크스는 국가를 자본의 산물로 간주하고 국가의 철폐를 자본의 철폐의 결과로 간주하는 것이다(특히, 엥겔스, 1872: 339 참조). 요컨대 마르크스는 국가주의/아나키즘의 거울반사 관계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곤란의 원천은 공산주의를 국가와 정치의 종언과 동일시하는 마르크스의 항상적인 테제에 있다. 이 목적론적 테제는 마르크스주의가 공산주의적 정치, 또는 그것의 다른 이름인 프롤레타리아 정치를 사고하는 데에서 해결 불가능한 이론적 장애로 작용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국가의 기능에 관련된『고타 강령 비판』의 언급(마르크스, 1875: 385)은 마르크스가 이 테제의 내재적 난점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그 난점은 그에게 끝내가시화되지 않는다.
주지하듯이 알튀세는 마르크스주의를 모든 목적론(teleology 또는 finalism; 역사의 의미/방향에 대한 이데올로기)에서 분리하려 노력했다.5) 그의 ‘모순의 복잡성, 과잉결정’이라는 관념,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 구조적 인과성 도식 등은 모든 종류의 역사철학(‘역사 속의 철학’에 대비되는 ‘역사에 대한 철학’)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는 자신의 전복적인 개념들과 테제들의 함의를 끝까지 추구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그것들의 파괴력을 두려워하고 항상 자기검열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알튀세의 이론 작업의 내재적 모순들이 나온다.6)
알튀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며 이데올로기 없는 투명한 사회로서의 공산주의란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다. 이데올로기가 영원하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도, 나아가 국가장치 일반과 따라서 국가도 영원한 것이 된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의 종언, 정치의 종언이라는 관념과 사회적 관계가 부재한 투명한 사회인 공산주의라는 공산주의관을 부단히 비판했다. 이러한 그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 없는, 국가가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으로 대체된 공산주의란 정확히 이데올로기적인 관념이다.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소멸의 대상이 아니라 전화의 대상일 뿐이다. 그는 1978년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마르크스]에게서 점점 더 비판되지만 그러나 항상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역사철학이라는 관념, 한정된 생산 양식들의 일련의 ‘전진적 시대들’[progressive Epochen]의 계기(繼起) 속에 체현된 역사의 의미/방향이라는 관념, 공산주의의 투명성으로 나아가는 관념을 발견한다. 우리는 마르크스에게서 “필연의 왕국”에 뒤이은 “자유의 왕국”[『자본』, 제3권, 제48장]이라는 이러한 관념론적 표상을, 거기서는 국가나 상품관계들과 마찬가지로 쓸모없게 되어버리는 사회적 관계들을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대체하게 될 공동체의 신화를 발견한다(알튀세르, 1978: 49-50. 인용자의 강조).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그는 국가 사멸에 관하여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전통적 입장을 고수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 글의 입장이 그의 이론적 관점과 수미일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당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글의 입장과 모순적인 태도를 견지했고, 이것이 1978년에 발리바르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발리바르는 1976년까지는 국가와 당 문제에 대하여 마르크스와 레닌의 입장에 충실했다. 그의 입장은 1976년 프랑스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폐기를 비판하기 위해 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에서 정연히 제시된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장치 파괴(destruction) 테제를 단호하게 변호한다(발리바르, 1976: 79, 99-100). 그러나 그의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파괴의 대상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순수히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언급이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현존 사회적 관계들의 외부에서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 노동자계급의 당은 부르주아 국가 ‘기계’의 외부에, 바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게임의 외부에 있을 수 없다”고 썼다(1976: 82, 번역 수정).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당이 국가의 외부에 있어야 한다는 알튀세의 주장(알튀세르, 1977: 83-4)을 비판하게 된다.

당이 근본적으로 국가 외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대중들 속에서의 활동을 통해서”라고 명확히 한다 하더라도, 무슨 뜻인가? …… 우리는 여기에서 당은, 당이 자신이 목표로 하는 종극목적[but final](공산주의=국가의 사멸)에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규칙들(rgles)의 산물인, 당원들의 (혁명적) 의지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그리고 따라서 당은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자신이 점하는 장소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게다가 스스로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정의할 수 있다는, 관념적 (그리고 관념론적) 당관을 보게 되지 않는가?(Balibar, 1979: 82).

당이 부르주아 국가의 외부에 있을 수 없다는 테제는 그가 전에 이미 제출한 것이다. 추가된 것은 주의론(主意論)적이고 목적론적인 당관에 대한 비판인데, 이 비판은 이후의 ‘국가장치의 파괴/국가 소멸 테제의 기각’을 예상하게 하는 것이다. 당 문제에 대한 알튀세와 발리바르의 1978년의 이러한 대립의 에피소드는 알튀세의 모순의 한 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철학을 발본적으로 비판하면서 동시에 당이 국가 외부에 있기를 희망한 것, 이것이 알튀세의 정치적 모순들 중의 하나였다.7)
발리바르는 1970년대 말 이래 몇 년간 마르크스를 다시 읽으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의 내재적 모순, 특히 그것의 역사철학적 측면을 전면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하며, 그 성과가 『마르스크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동요』(1983e)에 집약된다.8)

결국 우리는 여기서 엥겔스가 하나의 목적론에 대항하여 또 다른 목적론을 구사함을 본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우리는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수탈자의 수탈”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구절이 그 출발점을 이루는 사회주의로의 경향에 대한 엥겔스의 ‘변증법적’ 서술과 관련하여, 그가 ‘국가의 종언 일반(la fin)’이라는 비목적론적 관념(conception), 또는 말하자면 역사의 종언은 아닐 국가의 어떤 종언(une fin)이라는 비목적론적 관념이라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다시 봉착했음을 발견할 때 귀결하는 이론적 모호성에 너무 놀라지 말아야 한다(발리바르, 1983a: 249-50).

즉, 역사의 종언이라는 목적론에 대항하면서 동시에 국가의 종언으로서의 공산주의라는 관념을 유지하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공산주의=국가 사멸’을 역사의 종극목적(telos, le but final)으로 설정하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철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가 국가/사회, 자본/노동, 속박/자유, 위계/평등, 공적 이해/사적 이해, 계획/시장과 같은 일련의 정치적 대립쌍들에 의해 전체적으로 구조화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공간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이론적 곤란의 원천임을 밝힌다. 마르크스가 갇혀 있던 국가주의/아나키즘이라는 대립쌍은 바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이원적 구조에서 유래한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공간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리하여 과학/이데올로기, 진리/허위의 철학적 반정립을 한편으로는 해체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이 반정립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밝힌다. 동시에 그는 마르크스가 수행한 ‘노동과정과 국가 사이의 이론적 단락(短絡)’이 그러한 반정립의 해체의 길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발리바르, 1983b).9)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아나키즘’의 문제를 내용상으로는 이미 1970년대 말에 제기한 셈이지만, 이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그는 이와 관련된 자신의 이론적 전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나는 (내가 1976년의 저작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에서 썼듯이) 민주주의 자신의 계급적 경계들을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일반적 발전형태가 국가장치의 해체[파괴, dmantlement]라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국가의 사멸이라고 쓰지 않을 것이다. …… 오늘날 나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libertaire) 전통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적 아나키즘(사회주의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 적어도 그것의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 마르크스주의가 짧게 잡아도 나치즘과 대결하던 시절 이래로 직면해 왔으며 그것으로부터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 위기를 장악하여 해결할 수 없었던 무능력에 주된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Balibar, 1993: 157).

마르크스의 국가 사멸 테제의 문제점과 관련한 발리바르의 관심은 현실의 부르주아 국가의 전화에 대한 대응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무능력했다는 점에 집중된다. 국가에 대하여 전무 아니면 전부의 도식으로 접근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아나키즘은 그가 “마르크스의 사고의 반역사적 역사주의 또는 역사 없는 역사성”(발리바르, 1983b: 305)이라 부른 것과 상관적인 것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경우에 “자본주의의 역사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자본주의적 관계는 ‘자연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며, 한정된 기원의 산물이고, 내적 모순들을 내장하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의 대가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를 사고하고 분석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무능력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자본-임노동관계가 새로운 형태들을 취해간다는 것을 마르크스가 결코 진정으로 사고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히 마르크스주의는 이 자본-임노동관계의 전화와 상관적인 부르주아 국가 형태의 전화를 제대로 사고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국가의 전화에 대한 사고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보인 무능력의 다른 편에 있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당에 대한 목적론적·본질주의적 이해이다. 발리바르는 당 형태를 “계급투쟁 조직의 유일한 본질적 형태”로 간주하는 당 관념을 기각하고 당 형태를 계급투쟁 조직의 “정세적 형태”로 상대화시킴으로써(1983b: 303), 알튀세의 망설임을 넘어서서 역사철학적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기각한다.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지배하는 것은 목적론적 도식이지만, “오늘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라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정식과 공산주의에서의 국가의 기능에 대한 『고타 강령 비판』의 언급 등 명시적인 반목적론적인 진술들이 산재한다. “그의 텍스트 또는 체계나 교리라기보다는 흔적의 말소로서의 텍스처(texture)”에는 목적론에 대한 비판이 현존한다(발리바르, 2006: 90).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사고의 비목적론적인 요소들을 전개시킴으로써 국가 사멸의 기획을 국가의 발본적인 민주적 전화의 기획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그의 더 큰 이론적 진화의 한 부분을 구성할 뿐이다. 그의 이론작업은 국가와 따라서 변혁(transformation)으로뿐 아니라 ‘인간학적 차이들’로, 그리고 ‘반폭력(anti-violence)의 정치’로서의 ‘시민인륜(civilit)의 정치’로 확대된다.10)


3.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과 반폭력의 문제설정

알튀세는 단선적 인과성을 포기하면서 모순의 과잉결정, 이데올로기적 구조의 자율성 등의 관념들을 도입했지만,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을 ‘최종심급’으로 본다는 점에서 “정통적”이었다(Balibar, 1999). 처음부터 ‘과잉결정’과 ‘최종심급’ 간의 모순은 알튀세의 역사적 인과성 도식의 곤란이 집약적으로 표출되는 지점이었다. 알튀세는 ‘사회적 전체’의 환원 불가능한 복합성을 표현하는 과잉결정이라는 관념을 무기로 하여 역사에 대한 총체적 이론, 닫혀 있는 이론인 역사철학을 해체하려 했지만, ‘최종심급’은 그의 역사적 인과성 도식을 다시 닫힌 것으로 만드는 작용을 했다. 발리바르는 알튀세의 사고에 잔존하는 목적론적 측면을 제거하여 알튀세의 공산주의 상을 다음과 재구성한다.

하나의 생산 양식으로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든 ‘계기’에서(모든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들 속에 착근된 하나의 가능성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또 하나의 생활 양식, 사회적 관계들을 체험하는 또 하나의 방식, ‘지배적 보편성’에 반대하는 하나의 반역으로서 공산주의는 단지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의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 공산주의 혁명이 의존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미리 결정된, 이러저러한 형태의 ‘성숙성’에 도달했다는 필연성은 아니다. ‘성숙해야’ 하는 것, 그것은 착취로부터 파생되는 정치적 모순들이지, 자본의 집적률이 아니다(발리바르, 1991a: 188-9).

이렇게 알튀세 자신의 모순으로부터 건져낸 ‘알튀세의 공산주의’는 비가역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적이다. 이는 그것이 후에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공산주의’라 부르는 진화론적 공산주의관의 발본적 부정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발리바르는 착취, 계급투쟁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인과성이 예정된 주체의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심급에서’조차 결코 서로 같지 않은 대중과 계급의 모순적 절합(articulation)을 표현하는 역사적 과정이라는 비판적 개념”(발리바르, 1983c: 336)11)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계급투쟁 외에도 보편적인 사회적 적대들이 존재함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는 ‘화해 불가능한 모순으로서의 적대’에 대한 알튀세의 사고12)에서 더 나아가 보편적 적대가 복수로 존재함을 승인한다(발리바르, 1988a; 1989b; 1992b; 1996a, Balibar, 1994a). 그는 계급투쟁을 유일한 근본적인 또는 보편적인 사회적 적대로 파악하는 전통 마르크스주의를 기각하고 성적 차이(또는 성의 차이, la diffrence des sexes) 및 지적 차이(la diffrence intellectuelle)와 같은 ‘커다란’ 인간학적 차이들을 계급모순과 똑같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모순들’ 내지 분할들로 파악한다.13)
이 두 가지 인간학적 차이들 중에서 성적 차이라는 주제는 여성주의 이론가들 특히 뤼스 이리가레에 의해 높은 수준의 이론화가 되어 있고 윤소영 교수가 잘 소개해 왔으므로(특히 윤소영, 2007 참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나 발리바르 자신이 제시한 ‘지적 차이’ 개념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지적 차이는 마르크스에 이어 그람시, 알튀세, 알프레트 존-레텔(1970)과 같은 “철학자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 대부분”이 그것의 “역사적 해결을 공산주의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항상 간주”했으나(발리바르, 1993b: 81-3) 계급분할로 환원되지 않는 별개의 분할 내지 ‘모순’으로서 이론화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지적 차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접근하고자 한 하나의 현실이다.14)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 ‘분할’을 계급적대들의 최종의 토대로서 파악했지만15) 착취에 대한 과학적 이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 개념은 포기되고 생산 양식과 생산관계라는 개념으로 대체된다. 그러면서도 『고타 강령 비판』에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의 소멸이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를 정의하는 지표로 제시된다. 이와 관련된 마르크스의 딜레마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에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면서도, 또한 양자를 동일시하는 것, 하물며 착취를 그 분할로 환원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다.
마르크스로 하여금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 개념을 포기하게 만든 것, 즉 사회적 적대들을 계급투쟁으로 환원하게 만든 것은 그가 로크, 스미스에게서 물려받은, 노동을 인간의 본질적 활동으로 조정(措定)하는 ‘노동의 인간학’이다. 이러한 노동의 인간학은 “인간사회란 일반적 이익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의 조절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보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과 결합되어 “노동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들의 본질로, 유일하게 적대를 결정하는 근본적 실천으로” 간주하게 만들었고(발리바르, 1988a: 282), 계급 분할로 환원되지 않는 ‘육체성’과 ‘정신성’ 내지 ‘지성[지식성]’의 분할을 이론화시킬 수 없게 했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단순히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 차이’라는 관념을 도입하여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근대 정치에서 ‘억압’되어 온 이 인간학적 차이들은 불평등과는 다른 것들이라는 부정적 공통점과,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권리로서” “해방되어야 할” 것들이라는 긍정적 공통점을 갖는다. 이 차이들의 해방(libration)은 “권리의 평등 속에서의 차이의 중립화로서가 아니라”, “차이 자체인 어떤 평등, 특이성들(singularits)의 상보성과 상호성인 어떤 평등의 생산”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지적 차이’ 내지 ‘지식(savoirs)의 불평등’을 “대중과 엘리트의 차별적 재생산이자 사회적 활동들을 구획하고 위계화시키기 위한 교육제도들의 활용이자 동시에 ‘육체적(manuel)’ 생활 양식을 희생시키는 권위로의 경향 및 지향으로서의 ‘지적’ 생활 양식의 정당화”로 파악하고, 지적 차이를 창출하는 것은 불평등이지만 이 불평등에 대한 투쟁이 차이들의 제거(annula-tion)로 귀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지적 차이와 관련된 해방적 실천의 과제로 “지식의 중립화와 재분배”, “공적 공간에서의 표현의 권리라는 점에서 유식자들과 무식자들 사이의 등가성의 확립”, “지성(intelligence)과 지식(savoir) 사이의 상징적 분리의 확립”을 든다(발리바르, 1989b: 31-3, 번역 수정). 16)
성적 차이, 지적 차이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마르크스적 정치 개념의 개조를 요구하며, 마르크스의 단선적인 변증법적 인과성 도식을 대체할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을 요구한다.
발리바르는 이 새로이 구성될 인과성 도식이 “역사성의 보충물 또는 보완물처럼 작동하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합” 대신에 “양립 불가능하면서 동시에 분리 불가능한, 설명의 두 토대들로서의 주체화(sujtion) 양식(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 양식’ 내지 ‘일반화된 이데올로기’)과 생산 양식(또는 ‘일반화된 경제 양식’ 내지 ‘일반화된 경제’)의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Balibar, 1993: 160).17) 이 도식은 마르크스의 경제적 적대의 문제설정과 스피노자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성의 문제설정의 절합 위에 정식화된 것이다.18) 발리바르는 주체화 양식과 생산 양식의 결합의 필연성을, 어떠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도 상상적인 것(이데올로기)의 효과들은 현실적인 것(경제적 적대)을 통해서만, 그리고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현실적인 것의 효과들은 상상적인 것을 통해서만, 그리고 수단으로 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데에서 찾는다. 정치의 두 ‘타자’인 경제와 이데올로기는 각각 ‘타자의 타자’를 통해서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내가 역사유물론의 영역 안에서 견지해온 다음과 같은 테제와 수미일관하다: 상상적인 것의 구성체들 또는 주관적 구성체들은 경제와 정치의 반영 또는 상부구조가 아니며, 오히려 경제와 정치의 정신적(psychic) 질료, 의지대로 조작될 수 없는 질료이다. 따라서 행위한다는 것은 …… 법칙, 과학, 제도를 수단으로 하여 역사와 인간성을 “제어”하는 것, 형성하는 것, 심지어 조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행위한다는 것은 많은 경기자들과, 때로는 속이거나 술책을 쓰면서, 이데올로기와 경제의 위험을 무릅쓰고 또 이 위험에 대항하면서, 게임을 하는 것이다(Balibar, 1993: 163).

이렇게 상상적인 것의 구성체들, 즉 이데올로기가 “의지대로 조작될 수 없는” 경제와 정치의 질료인 이상, ‘필연의 지배’로부터 ‘자유의 지배’로의 이행, “사회적 관계들도 이데올로기도 없는 젖과 꿀과 포도주와 장미의 땅으로의 이행”이란 있을 수 없고, 반대로 “자유의 실현, 필연의 영역 안에서의 최대한의 자유의 실현”이 있게 될 뿐이다(Balibar, 1993: 162). 그의 이러한 입장은 정확히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의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이래의 발리바르의 작업의 중심에는 폭력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성찰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성찰의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딜레마란 폭력 그 자체의 폭력적 폐지로서의 혁명적 정치의 딜레마라는 인식이다. 폭력과 관련한 마르크스주의의 딜레마는 “정치를 폭력(경제적 소외의 폭력과 국가의 폭력)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정치를 재정초해야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에 반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세력들, 그룹들, 장치들을 대항폭력에 의해 제거하지 않고서는 정치의 재정초를 달성할 수 없다는 이중적 테제에 혁명적 정치가 전형적으로 지배된다”는 데에 있다(발리바르, 1992c: 183-4). 폭력에 대한 그의 성찰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해방적 정치에 내재된 폭력만이 아니라 강한 의미의 정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초주체적’이고 ‘초객관적’인 극단적 폭력을 대상으로 한다. 폭력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제시한 철학자들이 여럿 있지만, 발리바르의 작업의 차별성은 그가 마르크스의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 위에서 그러한 성찰, 이론화를 수행한다는 데에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잘 드러난다.

극단적 폭력은 제도들에 맞서(against) 출현하는 것만큼이나 제도들로부터(from) 출현하며, 폭력적 정치와 비폭력적 정치 사이에서, 또는 힘(force)과 법 사이에서 택일하는 것과 같은 ‘절대적’ 결정들(decisions)에 의해 이 원환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원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폭력의 정치를 발명하는 것, 또는 폭력이라는 이슈를, 즉 폭력의 형태들과 한계들을, 폭력의 조절과, 행위자들 자체에 대한 폭력의 사악한 효과들을 정치 개념과 정치의 실천에 도입하는 것이다. …… 특히, 그것은 폭력이라는 이슈와 반폭력의 전략을 해방적(emancipatory) 정치 바로 그 안으로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Balibar, 2002a: xi-xii).

‘비폭력’과 ‘대항폭력’의 순환을 이론적으로 극복하는, 폭력에 대한 또 다른 유형의 부정으로서의 ‘반폭력’의 문제설정의 구성에서 발리바르의 출발점은 다시 마르크스의 아포리아이다. 마르크스가 “사회적 관계들의 ‘생산’의 역사적 구조 속에서 폭력의 역사적 반복의 규정적 조건들을 확인하고 예상”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혁명적 이론가에게서보다 마르크스에게서,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의 비폭력 아니면 대항폭력이라는 문제설정이 아니라, 적어도 경향적으로 반폭력의 문제설정이 구성”되지만, 동시에 “본질 그리고 본질의 소외에 대한 인간학적 테제”는 다시금 마르크스로 하여금 “폭력 그 자체의 폭력적 폐지로서의 혁명적 정치의 ‘초월론적 연역’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발리바르, 1992c: 188-9).19) 그리고 마르크스에 뒤이어 “사회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최초의 혁명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한 이래로, 정치적 수단과 목표는 극단적 폭력이 해방의 정치의 핵심에 구축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Balibar, 2004b: 115).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이론적 대안은 반폭력을 조직하는 것, 즉 “다양하고 또 동시에 상호의존적인 폭력 형태들에 반대하는 집단적 ‘투쟁’을 정치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특히 현시대에 들어와 “안전과 불안전, 공적 폭력과 사적 폭력, 군사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 사이의 구별들, 심지어 인간적 폭력과 이른바 ‘자연적’ 재앙 사이의 구별들이 경향적으로 소멸되고 있기 때문에, (법에 의해) 폭력을 단순히 조절하는 것도, (국가에 의해) 그것을 외부로 격퇴시키는 것도, (혁명에 의해) 그것의 원인들을 제거하는 것도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발리바르, 1992d: 105). 그렇다고 반폭력을 조직한다는 것이 혁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대상인 국가나 경제뿐 아니라 혁명 그 자체를 ‘문명화’시키는 것, ‘문명적’이게 만드는 것이다(Balibar, 2004b).20) ‘혁명을 문명화시킨다’는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시민인륜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4. 국제주의, 인간학적 차이들과 공산주의

발리바르는 ‘설명의 두 토대로서의 주체화 양식과 생산 양식’이라는 역사적 인과성 도식과 ‘반폭력’의 문제설정 위에서 새로운 정치 개념을 가공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의 개조’의 문제설정을 한 걸음 더 구체화시킨다. ‘정치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에 조응하는, 루소로 대표되는 ‘해방(mancipation)’으로서의 정치(“근본적인 개인적 권리들의 집합적 쟁취”)로도, ‘정치의 타율성’이라는 관념에 조응하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변혁’으로서의 정치(“지배의 사회적 구조들 및 권력관계들의 사회적 변혁”)로도 환원되지 않는, ‘타율성의 타율성’이라는 관념에 조응하는 ‘시민인륜으로서의 정치’가 그것이다. 시민인륜은 “정치적 행위자들 간의 갈등의 인정·소통·조절을 막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의 감축을 통한,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 자체의 조건들의 생산”을 지칭한다(Balibar, 2001c: 183-4).

시민인륜의 정치는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정치입니다. 폭력의 진행을 예방하고, 중단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모든 개입이야말로 시민인륜의 정치의 예입니다. 시민인륜의 정치는 어떤 의미에서 ‘반폭력’의 정치이며, 정치의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 사회 변혁이라는 관념은 폭력에 맞서야 하는 필수적인 저항에 대해 충분히 주장하지 않습니다(Balibar, 2002b).

‘폭력의 정치’를 역으로 정식화시킨 것인 ‘시민인륜으로서의 정치’, 즉 ‘반폭력의 정치’는 ‘동일성들의 폭력’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21) 그렇다고 ‘시민인륜’ 개념이 사회 내의 갈등과 적대에 대한 억압이라는 관념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인륜의 정치는 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절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해방’, ‘변혁’, ‘시민인륜’이라는 이 세 가지 정치 개념 각각은 다른 것들을 전제하며, 그것들은 절합되어야 하지만, 그 절합의 단일한 모델, 단일한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발리바르, 1996b: 72).
발리바르는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과 반폭력의 문제설정에 입각하여 자신의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의 윤곽을 소묘한다. 우선 그는 역사에 존재한 세 가지 공산주의를 식별한다(발리바르, 1998: 65-7). ① 13-14세기의 청빈형제회(프란치스코회 엄격파)의 ‘가난 개념과 형제애 개념의 결합’에 근거한 공산주의[탈영유(d-propriation)에 기초하는 프란체스코적 공산주의], ② 14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하층계급의 투쟁에서 시작하여 고드윈, 바뵈프, 블랑키에 이르기까지 발전한 인간주의적 또는 ‘부르주아적’ 공산주의(근본적인 ‘평등자유’에 기초를 둔 혁명적 공산주의), ③ 생산물과 생산력의 재영유, 노동의 의식적 조직화로의 이행으로서의 사회주의적 또는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노동력의 사회적 재영유에 기초를 둔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공산주의는 “생산력과 인간적 생산성의 필연적 조직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원리적으로 반대하여 그것의 내재적 모순을 해결하고 그것이 담지하는 사회화를 인간 개인들의 공동의 생활 양식으로 승격시키는 생산 양식”으로서의 공산주의라는 관념에 기초를 둔다(발리바르, 1998: 62-3). 이러한 관념으로부터 ‘역사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표상과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테제가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레닌에 와서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는 진화주의적, 역사철학적인 사회주의적 공산주의로서 고정된다. 사회주의는 잠재적인 공산주의로 간주되고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귀결이자 완성으로 간주된다. 공산주의의 경제적 조건들은 자본주의의 ‘성숙성’으로부터, 또 그 주체적 조건들은 ‘계급의식’의 총체적 지배로부터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알튀세가 그 해체를 시작했고 발리바르가 그 해체를 완료한 것은 이러한 사회주의적 공산주의관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목적론적, 진화주의적인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의 종언을 확인하고,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에 대한 가설을 국제주의의 오늘의 형상이라는 쟁점, 그리고 평등의 확립에 의해 폐지될 수 없는 차이의 유형인 인간학적 차이들이라는 쟁점들과 관련하여 제출한다(발리바르, 1998: 70-8).22)
발리바르가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의 구성요소로 드는 것은 우선 국제주의이다. 그는 오늘날 국제주의가 “세계 속에서 저항들과 해방운동들을 서로 교통시키려는 일정한 능력, 또는 이전의 공산주의관과 새로운 공산주의관의 결합을 묘사하는 실천적인 보편주의를 구성하려는 일정한 능력 속으로 연장된다”고 주장한다(발리바르, 1998: 72).23) 자본주의 경제의 극단적인 불균등발전은 도시 생활의 불안전에서 다양한 유형의 ‘내부적’이고 ‘외부적’인 전쟁들을 거쳐 절멸적인 인종주의에 이르는 일반화된 폭력의 형태를 출현시킨다. 이러한 일반화된 폭력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방식으로’ 소묘되는 공산주의는 무엇보다도 ‘반폭력’이다. 그것은 “폭력에 대한 저항에서의 연대이고, 세계 사회의 ‘평화화’ 또는 ‘문명화’의 형태들의 발명에서의 연대”이다. 이 연대는 민족적 동일성, 문화적 동일성, 심지어 계급적 동일성의 전화 없이는 생각될 수 없는데, 이 동일성의 전화와 관련하여 공산주의라는 관념이 환기하는 ‘공동의 존재/본질’(공동체, Gemeinwesen, rtre-en-commun)은 국경의 지양으로, 즉 “개인과 집단에 대한 국가의 재량적 권력을 표현하는 제도로서의 국경을 민주화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국제주의의 이러한 재활성화와 구체화를 통해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적 전화의 결과 또는 종극목적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노동의 조직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의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조건으로 나타난다.
국제주의는 “마르크스적 공산주의가 지향했던 저 ‘반(反)유토피아’의 가장 유토피아적 측면”(발리바르, 1998: 71)이다. 『공산당 선언』이 부르주아 진영의 민족 공동체에 대립시킨 계급 공동체의 ‘이상적 형태’는 “마르크스가 보기에 유일하게 현실적인 국제주의였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다(발리바르, 1995c: 239). 그러나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국제주의는 언제나 하나의 이상으로서 염원되어 왔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부정되어 왔다. 그리하여 발리바르(1992e: 444)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시간”이 “끝난 것 같다”라고 말한다.
노동자 국제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의 시간의 종언을 선언한 발리바르는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질문을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질문으로 전위시킨다. 그는 이것이 오늘날 “국제주의에 도달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경유해야 할 필요는 없음”을 함축하는 정식이라고 말한다(Balibar, 2002b). 그는 평화주의, 반인종주의, 생태주의 등에서 포스트민족적 국제주의가 산개적으로 추구되고 있음에 주목하며, 새로운 국제주의는 더 이상 무매개적으로 하나의 ‘계급적 토대’에 기반을 두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비록 국제주의가 계급과 계급투쟁의 내용을 보존한다고 하더라도, 국제주의의 형태는 자율화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국제주의는 그 이름이 발명되어야 하는 하나의 정치적 동일성을 찾아내야 할 것”이라 한다(1992e: 444).
발리바르는 국제주의에 대한 새로운 규정에 이어 근대정치에서 억압된 성적 차이와 지적 차이 등과 같은 인간학적 차이들이라는 범주를 도입하여 공산주의를 새로이 정의한다. 그는 사회적 물질성의 유일한 토대를 노동에서 찾고 소외의 도식에 입각하여 소유/고유성(property)의 변증법적 회복으로서의 ‘수탈자의 수탈(expropriation)’을 지향하는 목적론적, 종말론적 공산주의관을 기각한다.
발리바르는 평등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적 요구는 계급폐지 요구이며 그 밖의 모든 평등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라는 『반뒤링』 제10장의 엥겔스의 주장에 주목하면서(Balibar, 1989: 43)24) 정치투쟁으로서의 계급투쟁은 “정치의 보편적 언어, 즉 시민성(citoyennet/citizenship)의 언어 속에서만 정식화될 수 있다”고 본다(발리바르, 1989a: 205). 그는 시민성의 역사적 전화와 관련하여 ‘비동시대성’ 속에 현존하는 ‘정치의 세 개의 시기’를 구분한다. 시민 개념이 자유인/노예 등과 같은 인간학적 차이들에 종속해 있는 고대적 시기와, 인간과 시민 개념이 잠재적으로 동일시되어 정치에 대한 권리가 모든 인간에게 개방되는 근대적 시기, 일반화한 시민성을 토대로 하는 추상적 또는 유적 인간 개념의 지양이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이른바 ‘탈근대적’ 시기가 그것이다(발리바르, 1989b: 37). 오늘날 추구되어야 할 시민성은 “인간학적 차이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이러한 차이의 제도적 자연화와 그 부정 혹은 형식적 중립화 같은 것과는 동시에 구별되는 이러한 차이의 변형으로의 명시적 경향을 갖는 시민성”이다(발리바르, 1989b: 32).
발리바르는 시민성의 형태의 역사적 전화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공산주의에 대한 논의로 연장한다. 그는 마르크스적 공산주의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공산주의관들의 ‘동일성 없는 불변요소(un invariant sans identit)’(발리바르, 1998: 67)25)로서 ‘개인주의와 사회화 사이의 대립’ 내지 ‘개인성과 공동체의 대립’의 지양을 든다. 개인성의 모델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적 공산주의를 한계에 봉착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인간학적 차이들 내지 분할들, ‘모순들’이다.26)
근대 정치의 혁명적 언술은 인간과 시민의 동일화 및 자유와 평등의 동일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발리바르가 말하는 프랑스 인권선언의 ‘평등자유 명제’), 이 동일화는 계급투쟁의 두 진영에서 각각 반정립적인 상이한 종류의 공동체(또는 ‘우애’)와 소유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제도적으로 안정화된다. 이 매개항을 이루는 것은 부르주아 진영에서는 민족 공동체와 자본주의적 소유이며, 프롤레타리아 진영에서는 계급 공동체와 (자본주의적 소유에 대립하는) 개인적 노동에 기초를 둔 소유이다(발리바르, 1989b: 26-8). 그런데 공동체에 의한 매개에서는 성의 차이라는 분할 내지 ‘모순’이 억압되며, 소유에 의한 매개에서는 지적 차이, 즉 ‘지적’ 지식(savoir ‘intellectuel’)과 ‘육체적’ 활동(activit ‘corporelle’)의 분할 내지 ‘모순’이 억압된다.
이러한 인간학적 차이들 내지 ‘모순들’이 점차 정치적 질문이 되면서 마르크스적 정치를 포함한 근대 정치는 그 한계들로 인도된다. 왜냐 하면, “일반적으로 정치적 의식과 담론 밖으로 밀려난[억압된](refoules hors de), 그 전혀 다른 유형의 모순들 혹은 분할들은 바로 개인성의 모델을, 즉 개인 일반이 인류의 표본으로 표상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고발하기 때문이다”(발리바르, 1989b: 30, 번역 수정) 남성과 여성은 개인이라는 하나의 주체성의 모델로 환원되지 않으며, 이것은 유식자와 무식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환원 불가능한 인간학적 차이들을 사상한 개인성 모델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다시 말해서 개인성과 공동체의 대립의 지양의 마르크스적 방식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이다.
인간과 시민의 동일화와 자유와 평등의 동일화에 기반을 둔 근대 정치의 혁명적 시민성을 부르주아 진영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은 부단히 보수적으로 해석해낸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보수적 해석 자체가 소유 및 공동체의 특수적 조직(자본주의적 소유 및 민족 공동체)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특수적 이데올로기에, 그리고 동시에 개인들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성적 차이 및 지적 차이라는 커다란 인간학적 차이들의 억압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본다. 그는 이중에서 전자는 더 자유롭고 덜 권위적인 공동체의 조직과 소유의 더 평등한 분배를 위한 투쟁, 특히 사회주의적 운동을 통해 우리가 맞서 싸울 수 있으나, 인간학적 차이들의 억압은 근대적 개인관의 완전한 개조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Balibar, 1992: 12).
인간학적 차이들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미래의(de l’avenir) 공산주의”가 아니라, “생성중인(en devenir)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가설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 가설이 여기에서 드러나는, 아마 이미 수많은 실천들, 유토피아적이라기보다는 푸코가 제안한 헤테로토피아적이라는 형용사가 들어맞는 실천들 속에서 실천적으로 추구되는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가설들―비록 사변적인 가설들이지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것은 인간학적 차이들의 문명화이고, 이 차이들의 ‘공유화(mise-en-commun)’, 또는 오히려 집단적 허구로서의 인류의 구성에 대한 이 차이들의 공헌 …… 의 공유화이다(발리바르, 1998: 77-8, 번역 수정).

오늘의 공산주의에 대한 발리바르의 이러한 가설은 극단적 폭력 또는 ‘잔혹’의 현상들이 일반화되는 오늘날의 상황에 준거한다. 세계 시장에서의 과잉인구의 ‘간접적 절멸’, ‘일회용 인간’의 생산과 같이 자본주의 경제의 극단적인 불균등발전이 초래하는 ‘초객관적’ 폭력과, 타자 전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배타적이고, ‘우리’와 ‘자기’ 내부의 이타성(異他性)의 그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자기의 고유한 실현을 강제하는 동일성의 ‘초주체적’ 폭력(발리바르, 1996b: 60)이 일반화되는 상황이 그것이다.
마르크스는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개인성과 공동체의 대립의 지양’의 한정된 몇 가지 측면들만을 검토할 수 있었다. 발리바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넘어서는 국제주의를 도입하고 마르크스의 노동의 인간학을 넘어 인간학적 차이가 기입된 개인성의 새로운 모델과 따라서 공동체의 새로운 모델을 도입하여 ‘개인성과 공동체의 대립의 지양’의 새로운 중요한 측면들을 포함시킨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상의 윤곽을 그린다.
발리바르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적’ 또는 ‘집산주의적’인 것도, ‘개인주의적’ 또는 ‘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니다(Balibar, 2001d). 공산주의는 “어떤 분업도 어떤 개인성의 ‘추상화 과정’도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성의 재건, 공동의 존재 그 자체가 필연적이게 만드는 특이성의 무한한 발전”을 추구한다. 개인성의 재건의 면에서, “극한적으로 사고한다면 공산주의는 또한 하나의 개인주의이다”(발리바르, 1998: 69). 이러한 발리바르의 사고는 소유와 관련하여 공산주의를 개인성의 재건으로 정의할 때의 마르크스의 사고27)와 정확히 일치한다. 단 발리바르는 개인성과 공동체의 대립의 지양을 보편적 소유 및 영유(appropriation)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인간학적 차이들의 관점에서 사고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이러한 가설들을 통하여 발리바르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는 “마르크스를 넘어서, 그러나 동시에 ‘개인성과 공동체 사이의 대립의 지양’이라는 마르크스의 인간학적 전망을 유지하면서, 공산주의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발리바르, 1998: 78). 그것은 보편적인 소유 및 영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넘어서는 확장된 국제주의, 반폭력, 인간학적 차이들의 문명화·공유화로서 정의되는 공산주의이다.


5. 마르크스와 함께, 그리고 마르크스를 넘어서

‘총체적 세계관’(레닌)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죽었고,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여 사고되고 실천된 공산주의도 죽었지만,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적 공산주의는 순수하고 단순하게 소멸하지 않는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의 무효화될 수 없는 요소들을 마르크스를 넘어서 발전시키고, 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의 기각할 수 없는 윤리적 이상들의 실현의 조건들을 사고하여 공산주의를 재활성화시키고자 한다.
결론에 대신하여 발리바르가 ‘정치의 개조’라는 일반적인 문제설정을 공유하는 몇몇 다른 공산주의 철학자들과 구별되는 지점들을 식별하여 그의 작업의 차별성을 부각시켜보려 한다.
발리바르에게 마르크스주의에서 무효화시킬 수 없는 것은 사회적 적대의 문제설정이고, 적대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으로서의 사회적 관계 개념이다. 계급투쟁 개념이 또한 그러한 것인데, 이는 그것이 총체화될 수 없는 것으로서 이해되는 한도 내에서 그러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이러한 입장은 그를 마르크스적인 사회적 관계 개념 자체를 기각하는 바디우(A. Badiou)나 랑시에르(J. Rancire) 같은 다른 포스트알튀세적 공산주의자들과 구별해주는 지표이다. 이들은 사회적 적대라는 의념(notion) 자체를 기각하지는 않으나 마르크스의 ‘관계의 존재론’과 따라서 적대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으로서의 사회적 관계 개념을 기각한다.
발리바르는 국제주의를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의 기각할 수 없는 핵심적 구성요소로 든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포스트마르크스적 공산주의자 네그리와 구별된다. 발리바르와 네그리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고 보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제국주의로부터 제국으로의 이행’, ‘초월적인 근대의 민족국가 주권을 대체하는 제국이라는 내재적 주권 형태의 등장’을 강변하는 네그리에게 국제주의는 어떠한 것이든 단순히 시효만료된 것이다. 그의 ‘제국’ 개념이 새로 등장하는 현실의 어떤 요소들을 묘사해주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적대들의 조절의 심급으로서의 국가라는 현실에 대한 그의 맹목, 그리고 초민족적 민족주의를 포함한 민족주의가 여전히 ‘총체적 세계관’으로서 작동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그의 맹목은 그의 공산주의 기획의 정치적 무능력의 주요 원천들 중의 하나이다.
발리바르는 보편적 소유 및 영유의 관점에서 구성되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단순히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및 영유와 함께 인간학적 차이들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사고한다는 점에서, 영유가 아니라 탈영유의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사고하는 데리다 및 낭시와 구별된다.28)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공산주의의 상이 예로 든 이들 철학자들의 공산주의29) 상보다 어떤 ‘이론적’ 기준에서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30) 그러나 그가 마르크스의 사상의 핵심에, 마르크스적 정치의 이상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 공산주의의 재활성화를 추구하는 철학자라는 점은 확언할 수 있다.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문제설정은 해답이라기보다는 질문이다. 그의 ‘시민인륜’의 정치 개념이 공산주의적 실천의 효과적인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지금까지 행해온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은 분석을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 인간학적 차이들의 “존중”(이리가레)을 넘어서는 “공유화”의 형태들은, 다시 말해 인간학적 차이들을 공산주의에 기입하는 구체적인 방안들은 발명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함께, 그리고 마르크스를 넘어서 정치와 공산주의를 사고하고 실천하려는 이들에게 발리바르의 작업은 가장 중요한 이론적 자원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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