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마르크스 자신이 쓰지는 않았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연합을 통한 혁명적 결합(revolutionäre Vereinigung durch die Assoziation)”(『공산당 선언』; MEW 4, S.474), “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ein Verein freier Menschen)”(『자본』 1; MEW 23, S.92), “연합된 생산자(die assozierten Produzenten)”(『자본』 3; MEW 25, S.456, 828) 등과 같은 표현들을 결합한 정식이다.
2)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각에 대하여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가한 최선의 이론적 비판 중의 하나가 발리바르(1976: 30-7)의 비판이다.
3) 참고로, ‘국가 공산주의(state communism)’는 바쿠닌이 마르크스주의를 라살주의와 싸잡아 비판할 때에 ‘국가 사회주의’와 함께 사용한 용어이다.
4)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발리바르(1983b: 279-82)에 의거한 것이다. 이하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함께 언급해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나, 마르크스만을 거명하여 논한다.
5) 알튀세 학파가 마르크스주의를 모든 목적론 또는 메시아적 종말론에서 분리하려 노력한 반면 데리다는 목적론과 메시아적 종말론을 분리하려 한다. 이 점에서 데리다와 알튀세가 형성하는 이단점에 대해서는 발리바르(2006)를 참조할 것.
6) 알튀세의 모순들에 대해서는 발리바르(1988b; 1991a; 1991b) 참조.
7) 그러나 알튀세는 1980년의 발작 이후에 쓴 유고들에서 극적으로 반목적론적인 ‘마주침의 유물론’ 또는 ‘우발성의 유물론’을 전개한다. 알튀세(1982-85: 97) 참조.
8)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1997)의 제3부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동요』의 네 편의 논문(「관념론의 교대군」; 「세계관들」; 「불잡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와 진리」)을 볼 것. 또한 발리바르(1981; 1988a)도 참조.
9) 1990년대에 들어 발리바르는, 마르크스가 정치와 경제의 단락시킴으로써 정치와 그 ‘타자’의 도발적인 동일화에 의거하는 획기적인 ‘정치의 타율성’ 이론을 구축했으나 바로 이 이론이 오늘날 다시 질문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고(Balibar, 1994a: xi; 발리바르, 1995c: 235), ‘타율성의 타율성’에 조응하는 ‘시민인륜으로서의 정치’ 개념을 가공해낸다(발리바르, 1996b).
10) 발리바르의 civilit 개념은 그 다의성 때문에 만족스러운 번역이 불가능하다. 그것을 ‘시민인륜’이라고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중들의 공포』(1997)의 “용어 번역에 대하여: ‘시민인륜’과 ‘의념(notion)’”을 보라. 이 ‘시민인륜’이라는 역어는 ‘문명성’이라는 함의를 잘 표현해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11) 마르크스에게 존재하는 ‘계급과 대중 사이의 비목적론적 변증법’의 요소의 확대전개라는 관점에서 발리바르의 이론작업을 소개한 서관모(2005)를 참조.
12) “알튀세는 적대를 구조적 인과성의 핵심으로 파악한 것으로, 그리고 마르크스에게서 적대라는 걸출한 범주를 읽어낸 것으로 보인다. …… 적대의 이름 아래 그는 그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 부른 것을, 즉 기원적 주체를 요청하거나(예컨대 노동을 인간본질과 동일시하기) 또는 적대의 종극적 제거를 요청하지 않는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사고한 것이다”(Balibar, 1996: 116-7).
13) 중요한 인간학적 차이에는 또 다른 것들이 있다. 발리바르는 인종주의의 효과로서의 종족적 갈등 역시 보편적인 갈등이라 보지만, 그것에 성적 차이, 지적 차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성적 기호의 차이, 건강인과 병자의 차이, 연령의 차이 등 인간학적 차이의 목록은 길다.
14)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육체적(krperliche) 노동/정신적(geistige) 노동’(『독일 이데올로기』, 『고타 강령 비판』)과 함께 ‘물질적(materielle) 노동/정신적(geistige) 노동’(『독일 이데올로기』, 『잉여가치학설사』)이라는 개념쌍을 사용한다(‘손노동Handarbeit’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만,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다). 마르크스의 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이 불어와 영어 문헌에서는 ‘손노동(le travail manuel; manual labor)과 지적 노동(le travail intellectuel; intellectual labor)의 분할’로 번역되는데, 전자가 표현해주는 ‘육체성’과 ‘정신성’의 대립이라는 쟁점이 후자에서는 다소 다른 뉘앙스를 지닌 ‘육체성(man-ualit)’과 ‘지성(intellectualit)’의 대립이라는 쟁점으로 표현된다. 발리바르의 ‘지적 차이’는 이 두 쟁점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15) 이하의 논의는 발리바르(1983d; 1985)에 의거한다.
16) 지성(intelligence)과 지식(savoir)의 동일화는 지성의 근거를 광의의 앎이 아닌 지적인 지식에 한정함으로써 무식자인 대중의 지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심대한 효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지식 및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식을 억압하며, “폭력과 지성의 이분법을 야기”하고 직접적으로는 무식자 대중에 의하여 행사되는 물리적 폭력만을 폭력으로 규정하게 하여 “지식인들이 폭력의 경제로부터 스스로를 제외하고 또 배제되”도록(발리바르, 1995a: 222) 만든다. 여기에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공동체와 관련되는 성적 차이에서는 ‘특이성의 추가(supplment)’가 과제인 반면, 소유와 관련되는 지적 차이에서는 ‘특이성의 빼기(soustraction)’가 과제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발리바르, 1989b: 32). 물론 이것이 ‘성적 차이의 추가, 지적 차이의 제거’를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17) 주체화 양식(la mode de sujtion)이란 “상징적 구조들의 작용하에서의 주체의 구성 양식”을 말하는데, 여기서 sujtion은 ‘복종’과 ‘주체화(주체로 되기)’라는 이중의 의미를 가짐에 유의해야 한다. 즉 ‘주체화 양식’은 ‘주체화/복종 양식’이다. 발리바르는 “주체화(sujtion)의 형태들”을 “복종(sujtion)의 형태들의 상관물들인 한에서의 주체화(subjectivation)의 형태들”로 정의한다(Balibar, 1994b: 89). 영어로는 용어가 구분되어 “subjection(sujtion)”은 “subjugation(sujtion)의 상관물인 한에서의 subjectivation(subjectivation)”이 된다. 참고로, 발리바르는 1983년에 이미 “마르크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국가의 모든 역사적 형태가 생산관계들의 형태와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의 형태로 이중의 ‘토대’를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발리바르, 1983e: 178, 각주 57. 이 각주는 『대중들의 공포』에 실린 판본에서는 삭제되었다).
18) 이 점에서 발리바르의 철학은 ‘스피노자적-마르크스주의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헤겔적-마르크스주의적’이다(그가 마르크스주의자인 한 그의 철학이 헤겔적-마르크스주의적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발리바르의 헤겔적-마르크스적 ‘부정성’에 대한 준거는,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보편성’의 한 종류(이상적/관념적 보편성)에 조응하는 ‘부정성이라는 전복적 요소’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주장은 1990년대 초 이래 여러 글에서 반복되어 온 것이다. 발리바르(1992c; 1995c; 1996a), Balibar(1994a; 1996; 2001a) 참조. 발리바르는 “마르크스 또는 헤겔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스피노자, 더욱이 프로이트로부터 …… 유래”한 알튀세적 이데올로기 개념(발리바르, 1991a)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유지한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 그리고 폭력/시민인륜에 대한 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된다. 근래의 예로 Balibar(2004a)를 참조할 것.
19) 발리바르는 헤겔적-마르크스적인 소외의 도식 자체는 아니라 해도 소외와 분리 불가능한 ‘부정성’이라는 의념(notion)과 관련한 문제를 알튀세가 해결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부정성이라는 의념 없이는 구조적 적대를 발본적인 저항의 형태들을 취하는 화해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정식화시킬 현실적 가능성이 없는데, 주체를 기각하는 알튀세의 구조적 인과성 도식이 부정성 의념과 양립 가능한가, 즉 “주체 없는 부정성” 또는 “주체 없는 소외”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어려운 질문이 제기된다는 것이며, 자신도 이에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Balibar, 1996: 118-9).
20) 혁명의 문명화와 국가의 문명화(civiliser l’Etat, civiliser la Rvolution)라는 테제는 Balibar(2001b)에서 제시된 것이다.
21) ‘동일성들의 폭력’은 종족간 형태, 민족간 형태, 종교간 형태 등 여러 형태를 취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치즘, 신나치주의,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종족적 갈등, 아파르트헤이트, 구미의 반이슬람주의, 동성애자에 대한 공격 등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상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2) Balibar(2006: 153-5)의 관련된 논의도 참조.
23) 발리바르의 이러한 입장은 네그리의 입장과 대비된다. 네그리가 ‘경계들의 부재’(하트·네그리, 2001: 19)를 특징으로 한다는 ‘제국’의 진보성을 내세우는 반면, 발리바르에게 문제는 “경계들의 민주화”(Balibar, 1998: 180), 즉 “경계들의 통제자들, 즉 국가들이나 초민족적 제도들 자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민주적 통제”이다(발리바르, 1993c: 457).
24) “동등한 권리는 원리상 여전히 부르주아적 권리”라는 『고타 강령 비판』의 마르크스의 테제도 참고할 것.
25) 발리바르는 과거에 바디우와 발메스(A. Badiou et F. Balms)가 제시한 ‘공산주의적 불변요소(invariant)’ 개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이 개념을 제시한다.
26) 발리바르(1995c: 239)도 참조.
27) 마르크스는 “협동노동과 공동소유를 토대로 하는 개인적 소유의 재건”에 대해 말한다(『자본』, 1권,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절).
28) 발리바르는 “인간의 탈영유(d-propriation)”를, 또는 “고유성(le propre)과 소유(proprit)의 논리로부터의 인간의 자유화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귀결하는 동일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가 Jean-Luc Nancy(“한가한 공동체”)와 데리다(“메시아적” 탈영유exappropriation라는 일반적 주제)의 이론화에서 오늘날 다시 발견된다고 말한다(1998: 66, 번역 수정).
29) 여기에 들뢰즈·가타리의 공산주의를 추가하고 싶다.
30) 그러나 네그리는, 그가 제시하는 공산주의 상과는 별도로 이론적 정합성이라는 면에서(서관모, 2007 참조) 이들과 같은 반열에 이르지 못한다.
2)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각에 대하여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가한 최선의 이론적 비판 중의 하나가 발리바르(1976: 30-7)의 비판이다.
3) 참고로, ‘국가 공산주의(state communism)’는 바쿠닌이 마르크스주의를 라살주의와 싸잡아 비판할 때에 ‘국가 사회주의’와 함께 사용한 용어이다.
4)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발리바르(1983b: 279-82)에 의거한 것이다. 이하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함께 언급해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나, 마르크스만을 거명하여 논한다.
5) 알튀세 학파가 마르크스주의를 모든 목적론 또는 메시아적 종말론에서 분리하려 노력한 반면 데리다는 목적론과 메시아적 종말론을 분리하려 한다. 이 점에서 데리다와 알튀세가 형성하는 이단점에 대해서는 발리바르(2006)를 참조할 것.
6) 알튀세의 모순들에 대해서는 발리바르(1988b; 1991a; 1991b) 참조.
7) 그러나 알튀세는 1980년의 발작 이후에 쓴 유고들에서 극적으로 반목적론적인 ‘마주침의 유물론’ 또는 ‘우발성의 유물론’을 전개한다. 알튀세(1982-85: 97) 참조.
8)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1997)의 제3부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동요』의 네 편의 논문(「관념론의 교대군」; 「세계관들」; 「불잡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정치와 진리」)을 볼 것. 또한 발리바르(1981; 1988a)도 참조.
9) 1990년대에 들어 발리바르는, 마르크스가 정치와 경제의 단락시킴으로써 정치와 그 ‘타자’의 도발적인 동일화에 의거하는 획기적인 ‘정치의 타율성’ 이론을 구축했으나 바로 이 이론이 오늘날 다시 질문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고(Balibar, 1994a: xi; 발리바르, 1995c: 235), ‘타율성의 타율성’에 조응하는 ‘시민인륜으로서의 정치’ 개념을 가공해낸다(발리바르, 1996b).
10) 발리바르의 civilit 개념은 그 다의성 때문에 만족스러운 번역이 불가능하다. 그것을 ‘시민인륜’이라고 번역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중들의 공포』(1997)의 “용어 번역에 대하여: ‘시민인륜’과 ‘의념(notion)’”을 보라. 이 ‘시민인륜’이라는 역어는 ‘문명성’이라는 함의를 잘 표현해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11) 마르크스에게 존재하는 ‘계급과 대중 사이의 비목적론적 변증법’의 요소의 확대전개라는 관점에서 발리바르의 이론작업을 소개한 서관모(2005)를 참조.
12) “알튀세는 적대를 구조적 인과성의 핵심으로 파악한 것으로, 그리고 마르크스에게서 적대라는 걸출한 범주를 읽어낸 것으로 보인다. …… 적대의 이름 아래 그는 그가 ‘기원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 부른 것을, 즉 기원적 주체를 요청하거나(예컨대 노동을 인간본질과 동일시하기) 또는 적대의 종극적 제거를 요청하지 않는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사고한 것이다”(Balibar, 1996: 116-7).
13) 중요한 인간학적 차이에는 또 다른 것들이 있다. 발리바르는 인종주의의 효과로서의 종족적 갈등 역시 보편적인 갈등이라 보지만, 그것에 성적 차이, 지적 차이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 밖에 성적 기호의 차이, 건강인과 병자의 차이, 연령의 차이 등 인간학적 차이의 목록은 길다.
14)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육체적(krperliche) 노동/정신적(geistige) 노동’(『독일 이데올로기』, 『고타 강령 비판』)과 함께 ‘물질적(materielle) 노동/정신적(geistige) 노동’(『독일 이데올로기』, 『잉여가치학설사』)이라는 개념쌍을 사용한다(‘손노동Handarbeit’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만, 사용되는 맥락이 다르다). 마르크스의 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이 불어와 영어 문헌에서는 ‘손노동(le travail manuel; manual labor)과 지적 노동(le travail intellectuel; intellectual labor)의 분할’로 번역되는데, 전자가 표현해주는 ‘육체성’과 ‘정신성’의 대립이라는 쟁점이 후자에서는 다소 다른 뉘앙스를 지닌 ‘육체성(man-ualit)’과 ‘지성(intellectualit)’의 대립이라는 쟁점으로 표현된다. 발리바르의 ‘지적 차이’는 이 두 쟁점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15) 이하의 논의는 발리바르(1983d; 1985)에 의거한다.
16) 지성(intelligence)과 지식(savoir)의 동일화는 지성의 근거를 광의의 앎이 아닌 지적인 지식에 한정함으로써 무식자인 대중의 지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심대한 효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지식 및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식을 억압하며, “폭력과 지성의 이분법을 야기”하고 직접적으로는 무식자 대중에 의하여 행사되는 물리적 폭력만을 폭력으로 규정하게 하여 “지식인들이 폭력의 경제로부터 스스로를 제외하고 또 배제되”도록(발리바르, 1995a: 222) 만든다. 여기에서 상론할 수는 없지만, 공동체와 관련되는 성적 차이에서는 ‘특이성의 추가(supplment)’가 과제인 반면, 소유와 관련되는 지적 차이에서는 ‘특이성의 빼기(soustraction)’가 과제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발리바르, 1989b: 32). 물론 이것이 ‘성적 차이의 추가, 지적 차이의 제거’를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17) 주체화 양식(la mode de sujtion)이란 “상징적 구조들의 작용하에서의 주체의 구성 양식”을 말하는데, 여기서 sujtion은 ‘복종’과 ‘주체화(주체로 되기)’라는 이중의 의미를 가짐에 유의해야 한다. 즉 ‘주체화 양식’은 ‘주체화/복종 양식’이다. 발리바르는 “주체화(sujtion)의 형태들”을 “복종(sujtion)의 형태들의 상관물들인 한에서의 주체화(subjectivation)의 형태들”로 정의한다(Balibar, 1994b: 89). 영어로는 용어가 구분되어 “subjection(sujtion)”은 “subjugation(sujtion)의 상관물인 한에서의 subjectivation(subjectivation)”이 된다. 참고로, 발리바르는 1983년에 이미 “마르크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국가의 모든 역사적 형태가 생산관계들의 형태와 이데올로기적 관계들의 형태로 이중의 ‘토대’를 갖는다”고 말한 바 있다(발리바르, 1983e: 178, 각주 57. 이 각주는 『대중들의 공포』에 실린 판본에서는 삭제되었다).
18) 이 점에서 발리바르의 철학은 ‘스피노자적-마르크스주의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헤겔적-마르크스주의적’이다(그가 마르크스주의자인 한 그의 철학이 헤겔적-마르크스주의적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발리바르의 헤겔적-마르크스적 ‘부정성’에 대한 준거는,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보편성’의 한 종류(이상적/관념적 보편성)에 조응하는 ‘부정성이라는 전복적 요소’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주장은 1990년대 초 이래 여러 글에서 반복되어 온 것이다. 발리바르(1992c; 1995c; 1996a), Balibar(1994a; 1996; 2001a) 참조. 발리바르는 “마르크스 또는 헤겔과는 별로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스피노자, 더욱이 프로이트로부터 …… 유래”한 알튀세적 이데올로기 개념(발리바르, 1991a)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을 유지한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역사적 인과성 도식, 그리고 폭력/시민인륜에 대한 논의의 이론적 기반이 된다. 근래의 예로 Balibar(2004a)를 참조할 것.
19) 발리바르는 헤겔적-마르크스적인 소외의 도식 자체는 아니라 해도 소외와 분리 불가능한 ‘부정성’이라는 의념(notion)과 관련한 문제를 알튀세가 해결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부정성이라는 의념 없이는 구조적 적대를 발본적인 저항의 형태들을 취하는 화해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정식화시킬 현실적 가능성이 없는데, 주체를 기각하는 알튀세의 구조적 인과성 도식이 부정성 의념과 양립 가능한가, 즉 “주체 없는 부정성” 또는 “주체 없는 소외”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어려운 질문이 제기된다는 것이며, 자신도 이에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Balibar, 1996: 118-9).
20) 혁명의 문명화와 국가의 문명화(civiliser l’Etat, civiliser la Rvolution)라는 테제는 Balibar(2001b)에서 제시된 것이다.
21) ‘동일성들의 폭력’은 종족간 형태, 민족간 형태, 종교간 형태 등 여러 형태를 취한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치즘, 신나치주의,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종족적 갈등, 아파르트헤이트, 구미의 반이슬람주의, 동성애자에 대한 공격 등과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상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22) Balibar(2006: 153-5)의 관련된 논의도 참조.
23) 발리바르의 이러한 입장은 네그리의 입장과 대비된다. 네그리가 ‘경계들의 부재’(하트·네그리, 2001: 19)를 특징으로 한다는 ‘제국’의 진보성을 내세우는 반면, 발리바르에게 문제는 “경계들의 민주화”(Balibar, 1998: 180), 즉 “경계들의 통제자들, 즉 국가들이나 초민족적 제도들 자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민주적 통제”이다(발리바르, 1993c: 457).
24) “동등한 권리는 원리상 여전히 부르주아적 권리”라는 『고타 강령 비판』의 마르크스의 테제도 참고할 것.
25) 발리바르는 과거에 바디우와 발메스(A. Badiou et F. Balms)가 제시한 ‘공산주의적 불변요소(invariant)’ 개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이 개념을 제시한다.
26) 발리바르(1995c: 239)도 참조.
27) 마르크스는 “협동노동과 공동소유를 토대로 하는 개인적 소유의 재건”에 대해 말한다(『자본』, 1권,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절).
28) 발리바르는 “인간의 탈영유(d-propriation)”를, 또는 “고유성(le propre)과 소유(proprit)의 논리로부터의 인간의 자유화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귀결하는 동일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가 Jean-Luc Nancy(“한가한 공동체”)와 데리다(“메시아적” 탈영유exappropriation라는 일반적 주제)의 이론화에서 오늘날 다시 발견된다고 말한다(1998: 66, 번역 수정).
29) 여기에 들뢰즈·가타리의 공산주의를 추가하고 싶다.
30) 그러나 네그리는, 그가 제시하는 공산주의 상과는 별도로 이론적 정합성이라는 면에서(서관모, 2007 참조) 이들과 같은 반열에 이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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