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바로가기)에 이어 오늘은 프랑수아 마트롱(François Matheron)의 글 일부를 번역해 올립니다.^^ 원문은 François Matheron, “Des problèmes qu’il faudra bien appeler d’un autre nom et peut-être politique ― Althusser et l’insituabilité de la politique”, Multitudes No.22, 2005/3(바로가기)입니다.
프랑수아 마트롱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알튀세르 주요 유고의 편집자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의 『야생적 이례성』(야만적 별종)과 『제헌 권력』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제헌 권력』은 에티엔 발리바르와의 공역입니다), 현재는 철학 잡지 Multitudes 편집실 공동사무처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인터뷰와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장진범 선생님께서 번역해 주셨습니다. 까다로운 원문을 꼼꼼하게 번역해 주신 장진범 선생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글은 정치와 철학,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라는 알튀세르 필생의 화두를 다루고 있는데, 이 화두는 특히 1966년 이래 다양한 ‘자기비판’을 통해 한층 명시되고 전면화된 바 있다. 알튀세르 유고의 편집자이기도 한 프랑수아 마트롱은, 이 질문을 사고하기 위해 알튀세르가 경유한 특권적 대상이 다름 아닌 마키아벨리였음을 세심한 유고 분석으로써 논증한다. 일찍이 1972년에 ‘책’의 형태로까지 정리되었지만 끝내 미완성·미발표 원고로 남은 『마키아벨리와 우리』는, 알튀세르에게 일종의 ‘지적 실험실’ 노릇을 했고, 결국 알튀세르 자신, 나아가 맑스주의 전통을 능동적인 의미에서 ‘미완성’ 곧 ‘해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마키아벨리 독서를 통해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론주의’를 정정할 수단을 다듬었으며, 맑스주의 전통에 내재한 반(反)정치주의 경향을 발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와 알튀세르(따라서 결국 맑스)의 대화, 그 결정적 효과 중 하나로서 정치와 철학에 대한 끊임없는 재개념화는, 1966년 이후 알튀세르의 지적 궤적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일뿐더러, 맑스주의의 미래, 나아가 맑스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와 철학의 미래를 사고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알튀세르 효과’를 사고하려는 모든 이들이 마키아벨리를 우회할 수 없는 까닭이다. ― 옮긴이]

……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위대한 독창성은 기발한 ‘이론적 배치’를 구축해 낸 데 있다. 사실 ‘이론적 공간’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Machiavel et nous", Écrits philosophique et politique, T.2, Stock/Imec, 1995, p.60). ‘순수 이론’의 공간과 ‘정치적 실천’의 공간 ― 곧 정치적 실천의 우위에 따르는 이론의 공간. 여기서 진정한 문제는 이론적 공간이 둘이라는 점이지, ‘실천의 공간’과 이론적 공간이 대립한다는 점이 아니다. 또는 차라리, 동시에 [존재하는] 두 가지 대립이 문제다. 한편으로 두 개의 이론적 공간이 있는데, ‘순수’라는 형용사가 차이를 표시해 주지만, 이는 즉각 추가되는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이라는 문구 때문에 곧장 완전히 상대화된다. “순수 이론의 공간,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론/실천’의 구별 같은 무엇이 재발견된다. “첫번째 공간, 곧 이론적 공간에는 어떤 주체도 없는 데 반해(진리는 있을 법한 모든 주체에게 유효하다), 두번째 공간은 가능하거나 필요한 주체를 통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이론적인 공간”이 의미하는 것은, 어쨌거나 두번째 공간이 사실상 이론적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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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가 볼 때 마키아벨리(그림)는 ‘정치학’의 배치를 해체한다. 보편적 규칙들을 구체적 사례 분석에 적용하기는커녕, 마키아벨리는 정반대로 규칙들의 언표를 성취해야 할 과업의 요구에 따르게 한다. 그는 ‘정세하에서’(sous la conjoncture) 사고한 것인데, 이는 ‘정세에 대해’(sur la conjoncture) 사고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정세의 서로 다른 요소들은 더 이상 이론이 반성해야 하는 객관적 여건이 아니라, “역사적 목표를 위한 투쟁에서 현실적․잠재적 세력이 되고, 그 관계는 세력 관계가 된다”. 즉 이론적 요소들 자체가 정세 안에서 작용하는 세력들이 되는 것으로, 이때의 이론은 실천에 적용될 시 활용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주체 없는 진리들이 되는 것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알튀세르는 1962년에 ‘개념들의 회전문’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을 다른 말로 손질하면서 ‘이론의 낯선 동요’에 관해 말하는데, 이는 자기 안에 ‘어떤 비어 있는(vide) 곳’을 확보하는 역량에 의해 이론을 정치적 차원 안에 들어맞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비어 있는 곳, 다시 채우기 위한 공백(vide), 거기서 위치를 점할/입장을 취할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를 삽입하기 위해 [확보된] 공백, …… 역사가 할당한 정치적 과업을 성취할 수 있는 세력들을 구성하기 위한 공백 ― 미래를 위한 공백(Ibid., p. 62.).”

이 자리가 공백인 까닭은 이탈리아의 정세가 뚜렷하게 식별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들이 부재하다는 특징을 갖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공백이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나타내고 싶어 하는 모든 이론의 특징이기 때문인가? “나는 이곳이 항상 점유되어 있더라도 비어 있다고 말한다. 내가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지점에서 나타나는 이론의 동요를 표시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이 장소는 반드시 다시 채워져야 하기 때문에, 즉 개인이나 당이 여러 세력들 사이에서 한 몫 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동맹 세력들을 다시 결집시키고 주요 세력이 되어 다른 이들을 타도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해질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점유되어 있는’ 비어 있는 자리가 도대체 무엇일까? 알튀세르적 반성의 논리는, 이 자리가, 비어 있는 까닭에, 정말로 점유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마키아벨리적 선언은 『공산당 선언』보다 무한히 더 생산적이라고, 이론은 이 공백을 채울 것을 떠맡는 순간부터 정치적이기를 그친다 ― 이런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과학과 (‘과학’의 성과를 ‘대중들’이 수용하게 만들려 하는) 정치 선전의 이분법에 직면하게 된다 ― 고 단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다른 차원의 사고와 삶이 알튀세르를 이끄는데, 이를 지배하는 정반대의 원리에 따르면 정치적 주체들은, 오늘날에야말로, 노동자계급 및 그 당이라는 모습과 동일화될 수 있으며, 이 자리는 최종적으로는 결코 비어 있지 않다. 항상 비어 있는 자리와 항상 가득 찬 자리 사이, 우리는 정치에 관한 알튀세르적 구상을 특징짓는 긴장의 한가운데 있다.

철학, 정치: 카드를 섞기

마키아벨리에 관한 반성은 1966년 이래 정치와 철학이라는 관념들을 둘러싸고 알튀세르가 수행한 극히 복잡한 곡예의 원천 중 하나이며, 생전에 공간된 작업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철학의 외적 조건 중 하나인 동시에 내적 요소들 중 하나, 어쩌면 철학의 고유한 요소로서 정치. 1966년 이래 진척된 다양한 ‘자기비판들’에 본질적인 특징이 이것이다.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의 알튀세르가 볼 때, 맑스는 새로운 과학(‘역사유물론’)과 동시에 새로운 철학을 창시했다. 후자는 맑스에게서 주로 ‘실천적 상태’에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말하자면 이론적 상태로 철학을 정교화하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철학은 과학적 성질을 지녔고 또 지닐 것으로, 즉 ‘순수 이론’의 공간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철학의 재정치화’가 장차 문제 삼게 될 것이 바로 이것으로, 이 몸짓[철학의 재정치화]으로써 알튀세르는 철학을 과학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하는 동시에, 정치의 본성 자체에 관한 명시적 불안으로 나아가게 된다. 알튀세르가 구축하려던 새로운 배치의 복합성이라는 관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시기가 거의 같은 두 문구를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프란카에게 보내는 1966년 9월 13일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반성이 나타난다. “역사유물론은 일반 이론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 이론이나 정치적인 것과 정치의 이론 …… 또는 이데올로기 이론이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경제적 심급의 이론은 …… 이 일반 이론의 국지적 이론들이라는 게 요즘 내 생각입니다.” 따라서 정치는 심급들의 체계 안에서 규정된 자리를 할당받게 된다. 다른 종별적 영역들과 나란히 있는 종별적 영역, 과학 또는 그 자체로 종별적인 과학들의 대상. 편지에서는 누가 이 자리를 할당하는지 말하지 않지만, 답이 무엇인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철학 이외의 무엇일 리가 없는 것이다. 알튀세르 서고에 보관된 긴 육필 노트가 이를 확증한다.

복수의 일반 이론들이 있으며 …… 이들은 국지 이론들을 결집시킨다. 국지 이론들과 일반 이론들을 서로 비교하면 …… 일반 이론들 사이의 공백들, 즉 새로운 일반 이론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 이 진술은 ‘최상의 일반 이론’(또는 철학)에 대한 진술이자 요구일 뿐이다.” 철학은 이처럼 다른 이론들의 집합에 자리들을 할당하는 ‘최상의 일반 이론’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하지만 바로 뒤에 이어지는 분석에서 해체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철학이 사고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존하는 국지 이론들과 일반 이론들의 집합의 정세다. 철학이 현존 이론들의 정세에 대한 이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철학이 이론들의 이론이 아니라는 뜻이다. 일반 이론들의 일반 이론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게 있다면 절대 지식이 되어 버릴 것이다 ― 철학은 현재적 연접(連接)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존 이론들의 접합에 대한 이론일 뿐이다. 철학의 대상은 현존 대상들의 현재적 복합성일 뿐이며, 철학 이론은 그 자체가 [이 복합성의] 한 요소다. 정세의 이론이 됨으로써 철학은 그 자체 정세의 효과로, 정정하고-재분류하고-개방하는 효과로 스스로를 생각한다. 따라서 철학은 이론인 동시에 전략으로 실존하며, 전략인 동시에 전술로 실존한다. 정세를 사고한다는 것은 정세에 대한 이 사고의 정정-재분류-개방 효과를 사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모든 철학은 정치적이거나 실천적이다. ‘윤리학’[인 것이다].” ‘현존 이론들의 정세의 이론’인 철학은 실로 ‘최상의 일반’ 이론이다. 하지만 철학이 ‘가장 일반적’이라면, 이는 철학이 항상 ‘현재적’인 정세들 속에서 ‘사물들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한 개입을 목표로 하는 전략인 한에서다. 즉 관용적 의미의 ‘일반적’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의미에서, 곧 ‘정치적’인 한에서다. 역으로, 이 전략의 효과들 중 하나는 철학 자신이 스스로에게, 복합성의 단순한 ‘요소’라는 철학의 고유한 자리를 할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철학은 바로 이 ‘단순한 요소’로서, ‘위치 지어진’(située) 실천으로서 이 일반성을 목표로 삼는다. 대개 철학이 일반성을 목표로 삼는 것은, 철학의 고유한 실천에 대한 전적인 맹목 속에서, 철학의 본질에 대한 전적인 부인 속에서다. 항상 스스로와 다른 곳, 정치의 장소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철학은 사물들에 관한 진리를 단언한다고 우기면서 그 정치적 차원을 끊임없이 부인한다. 맑스주의 철학은, 또는 알튀세르가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을 이 철학은, 명시적으로 철학의 고유한 장소에서, 곧 정치의 장소에서 말한다(말할 것이다?). 이 때문에 자연히 가공할 만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왜냐하면 이제껏 살펴본 모든 것이 정확하다면 정치는, 어떤 할당가능한 자리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적어도 용어적 의미에서는, 장소를 차지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치 자체를 변용하는 전위들 쪽으로 넘어가 보자.

철학이라는 주제에서 우리가 막 포착한 것을 정치와 관련하여 재발견하더라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정치‘적인 것’이나 ‘정치’는 위치 지어진 장소를 차지하거나, 어떤 경우라도 알튀세르가 1968년 이래 힘주어 강조한 맑스주의적 ‘토픽’ 안에 ‘위치 지어질 수 있다’. 1967년 10월 28일, 「철학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노트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썼다. “토픽이란 자리를 배정하는 것(mise en place)으로, 이론적 장 안에서 장소를 지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장소에 따라서 각 세력에게 부여되는 유효성에 따라 세력 관계를 지정하는 것이다. 모든 자리 배정은, 우선, 세력 관계의 배정이다. 토픽은 이론적이지만, 잠재적으로 실천적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데, 토픽이 그 이론적 표현 안에서, 그 이론적 전개의 양상 안에서(이는 장소를 배정하는 것이다. 도박사들이 노름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잡는 것처럼, 부대가 전투를 위해서 위치를 취하는 것처럼) 이미 고유한 활용법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토픽이 심급들의 자리를 배정할 때 따르는 (모두 같은 것이지만, 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원리는 그 자신에게 여러 심급들 중 하나의 자리를 배정하는 원리다. 하지만 이 원리는 사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처럼 보이는 자리를 정의상 초과한다. 알튀세르가 활용한 카드놀이라는 은유를 취하여 다른 식으로 말할 수도 있다. 카드 도박사들은 외양상 이미 구성된 배치, 거기서 자리 잡는 게 고작인 이 배치 안에서 스스로 자리를 배정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이 ‘자리를 배정한다’는 심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 심상에 그것이 요구하는 능동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도박사들을 끊임없이 ‘카드를 섞는’ 이들로 사고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철학과 정치는 이처럼 스스로 둘로 나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론’ 지위의 동요야말로 이론을 ‘정치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동요가 확대된다는 점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에는 ‘이론인 동시에 전략인’ 철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자신 둘로 나뉘는 정치적 실천이 있는데, 알튀세르는 「정치적 실천의 독특한 지위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1967년 10월 8일 노트 ― 이 노트는 철학에 관한 모음집 예비 서류에서 발췌한 것이다 ― 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 노트에서 정치적 실천은 ‘투명한 동시에 불투명한 지대’로 묘사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실천이란 투명하다. 여기에서 이 작업은 (실재하는 것인지, 장차 구축해야 할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당의 존재론에 깊이 ‘사로잡혀’ 있는데, 당의 존재론은 알튀세르에게 있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는 거기서 진심으로 빠져나오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끝내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다음과 같은 시사적인 관념을 언표했다. “모든 실천은 그 자신의 명증성, 명증성들, 그 자신의 경험을 산출하는데, 이는 자기-정정적이며, 그 결과는 비판과 ‘교훈’ 안에 반영된다.” 여기서 ‘명증성’이라는 관념은 긍정성을 띠는데, 이런 긍정성은 보통 이 관념을 이데올로기에 귀속시킨 알튀세르에게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렇지만 이 투명성은 ‘불투명성’과 뗄 수 없이 연결된다. “불투명. 우리는 정치적 실천의 이론을 수중에 넣지 못하고 있다.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은 단지 그 가능성의 이론일 뿐이다(게다가 장차 구성해야 하는 이론.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우리는 이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 …… (레닌과 마오 같은) 고전적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은 …… 정치에 대한 정치(une politique de la politique), 즉 정치적 실천에 대한 정치, 정치에 대한 정치의 형태로 된 정치적 실천의 정의이지, 정치적 실천의 이론, 그 작동방식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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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는 이 부재가 결함이라고, ‘참된 이론’을 구축하고,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순수 이론’으로 곧장 나아감으로써,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채워 넣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함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마 동시에 다른 것을 의미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 불투명성이 그 고유한 지정불가능성(insituabilité) 안에서 정치의 본성 자체와 동질적인 것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1967년 5월 4일자 「정치-이론 정세에 관한 노트」에서 알튀세르는 제자들의 발의로 건립된 마오주의 그룹 UJC-ml과 유지했던 관계를 다루면서, 실제로 이렇게 쓴다. “이 경우, 과소평가/과대평가의 근저에서 이론과 정치의 부정확한 관계 설정이 발견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론과 정치 사이의 성급한 단락(短絡)이 발견된다. 즉 정치를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데 이론이면 충분하다는 관념이 발견되는데, 그와는 반대로 올바른 이론에 입각하여 정치를 정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한 정치’가 있어야만 한다. 이 정치에 대한 정치 자체는 이론적으로 사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종별적인 대상, 곧 정치, 즉 정치적 행위의 조건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정치 이론 일반과 구별된다. …… 결정적인 것은 정세의 객관적 내용이다.” ‘정치에 대한 정치’는 여기서 분명 단순한 ‘정치 이론’과 대조되는 가운데 긍정적인 용어로 파악된다. 하지만 이 ‘정치에 대한 정치’ 자체는 이론적으로 사고될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동어반복을 이룬다.……

2010/08/23 22:25 2010/08/23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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